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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3.15 새 교황의 이름은 프란치스코? 프란체스코?
  2. 2012.12.21 멘붕의 시대
  3. 2012.12.21 하나님께서 한국에게 구하시는 것
  4. 2012.12.21 전환점에 선 한국 교회
  5. 2012.12.21 모순되 보이는 성경 구절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6. 2012.12.21 정치 지도자를 대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세
  7. 2012.12.21 이 나라를 향한 하나님의 보호
  8. 2008.03.23 부활절 묵상
  9. 2008.03.09 은혜와 진리
  10. 2008.03.02 야곱과 에서

새 교황의 이름은 프란치스코? 프란체스코?

카테고리 없음 2013. 3. 15. 18:46



교황의 이름은 유럽의 경우 자기 언어 기준으로 적고, 따라서 요한 바오로 2세는 영국에선 John Paul II, 프랑스에선 Jean-Paul II 였죠. 이런 이름은 성경(가톨릭에서 쓰는 번역)에 나온대로 적으면 되니까 논란의 여지가 없습니다. 새 교황의 경우 아르헨티나 사람인데, 아르헨티나에서 쓰는 스페인어로는 Francisco입니다(미국의 도시 샌 프란시스코와 같음). 그럼 이 Francisco라는 성경에 안나오는 이름을 어떻게 한국어로 적을 것인가가 문제인데, 규정상 스페인어에서 자음 앞의 C가 나오는 이런 경우 ㅅ으로 적는 것이 옳습니다 ( http://pyogi.pbworks.com/w/page/7191663/에스파냐어%20자모와%20한글%20대조표 ) 그러면 프란시스코가 맞죠. 혹시 교황청이 이탈리아에 있으니(엄밀히 말하면 독립국이지만), 이탈리아 표기는 아닐까 할지 몰라도, 이탈리아어로는 Francesco, 즉 프란체스코가 맞기에 프란치스코는 아닙니다. 프란치스코는 스페인어와 이탈리아어가 묘하게 섞인 이상한 발음입니다.

http://ko.forvo.com/word/francisco/
이 사이트에 가 보면 스페인어를 쓰는 사람이 발음하는 Francisco를 들어볼 수 있는데, 남미권 사람들은 "프란시스코"라고 발음하고, 스페인 사람들은 "프란띠스코"에 가깝게 발음합니다. 그래도 프란띠스코는 프란치스코와도 다르고, 교황의 모국이 아닌 먼 나라의 발음이기에 상관도 없으며(미국 대통령 이름을 영국식으로 부르는 격), 외국어 한글 표기 규정에도 어긋납니다. 근데 신기하게 거의 모든 언론에서 프란치스코라고 발음하는 것은 한국 천주교에서 성 프란체스코를 성 프란치스코로 부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이런 사이트 http://www.ofmconv.or.kr/ ). 그럼 왜 천주교는 성 프란체스코를 성 프란치스코라고 부를까요?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추측을 해보자면 프란체스코의 라틴어 이름이 Franciscus입니다. 이 이름을 교회 라틴어로 발음하면서 어미를 us에서 o로 바꾸면 프란치스코가 됩니다. 이런 추측이 맞다면,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은 스페인어도 이탈리아어도 아닌, 변형된 라틴어 이름이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작은 발음의 차이이긴 하지만 조사하다 보니 좀 기이한 결론에 다다랐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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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붕의 시대

카테고리 없음 2012. 12. 21. 03:16

올해 최고의 유행어는 멘붕이라는데 이견이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멘탈 붕괴"(mental breakdown)라는 표현의 준말인 멘붕은 다양한 신문 기사에 언급되었을 뿐 아니라 개그 콘서트에 "멘붕 스쿨"이라는 코너가 생겼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멘붕이라는 말은 매우 부드러운 소리(ㅁ, ㄴ, ㅇ 은 매우 부드럽고, ㅂ도 그리 거칠지 않습니다)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발음하기가 쉽고, 멘탈이라는 영어와 붕괴라는 한자어가 이질적인 요소를 극복하고 함께 섞였다는 점에서 코믹한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멘붕이 유행한 진정한 이유는 이 말이 우리가 사는 시대를 잘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영어의 mentality의 근원이 되는 불어의 망탈리테 (mentalité)는 한 집단의 사고방식, 세계관, 태도 등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이러한 망탈리테는 시대에 따라 변하고, 갑자기 망탈리테가 바뀌는 순간, 기존의 망탈리티를 소유한 사람은 자신이 믿던 세계관이 무너지는 경험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멘탈 붕괴, 즉 멘붕인 것이죠. 예를 들어, 코페르니쿠스 이후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 중심으로 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멘붕에 빠졌습니다. 프랑스에 혁명이 일어나 국민이 왕을 처형하는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은 멘붕에 빠졌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소련이 해체되는 모습을 보며 많은 공산주의자는 멘붕을 경험했습니다. 멘붕은 역사가 진보할 때 뿐 아니라 역사가 후퇴할때도 발생합니다. 1차대전 후 독일에 나치정권이 들어서면서 어렵게 이뤄낸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많은 독일인은 멘붕에 빠졌습니다.

지난달에 치뤄진 미국 대선도 많은 이들에게 멘붕을 안겨줬습니다. 미국인 중 "미국은 보수적 백인이 주도하는 나라고, 흑인은 사회에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존재일 뿐이다"라고 믿는 사람에게 흑인 대통령의 재선은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입니다. 그에 비해 "흑인은 백인에게 많은 핍박을 받았지만, 지금은 백인과 완전히 평등한 존재다"라고 믿는 사람에겐 오바마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현실이 받아들이기 힘들겠죠. 이처럼 두가지 세계관이 치열하게 대치하는 상황에서 치뤄지는 대선은 늘 한쪽에 멘붕을 안겨주기 마련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었을 때 "김대중은 빨갱이"라고 굳게 믿고 살아온 사람은 멘붕에 빠졌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되었을 때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민주주의가 후퇴한다"라고 믿던 사람은 멘붕에 빠졌습니다. 이번 대선은 "좌파 빨갱이에게 권력을 내줄 수 없다"라는 주장과 "박정희의 독재시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주장이 맞섰고, 양쪽 모두 물러설 수 없는 한판 승부를 벌였습니다. 결국 결과를 보며 한쪽은 멘붕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실제로도 많은 분이 멘붕에 빠졌습니다.

이러한 집단적인 멘붕의 시대는 곧 이론이 발전하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멘붕이 온 사람은 현실을 이해하고 이에 맞는 세계관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고, 이는 곧 중요한 이론적 발전으로 이어지죠. 프랑스 대혁명을 보며 멘붕에 빠졌던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는 혁명의 이념을 비판하는 "프랑스 혁명에 대한 고찰"을 썼고, 이는 곧 정치적 보수주의의 기초를 제공하는 책으로 자리잡습니다. 영국에서 시작한 자본주의가 독일로 옮겨오던 시기에 살던 칼 마르크스는 경제가 발전할수록 노동자가 가난해지는 모습을 보며 멘붕에 빠졌고, 결국 그의 자본주의 비판은 공산주의의 탄생으로 이어집니다. 20세기 들어 기존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물리 현상(예를 들어 자외선 파탄) 때문에 많은 과학자는 멘붕에 빠졌고, 이는 결국 양자역학의 탄생으로 이어집니다. 지금 대통령 선거 결과를 보며 멘붕에 빠진 사람들은 많은 글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이는 기존의 망탈리티와 맞지 않는 현실에 직면했을 때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반응입니다. 이러한 고민과 성찰은 언젠가 미래를 바꾸는 열매를 맺기 마련입니다.

이스라엘과 유다가 강대국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게 되었을 때 많은 사람은 멘붕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나라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쉽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수많은 선지자가 등장해서 새로운 수준에서 하나님의 뜻을 가르쳤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이 붙드시는 하나님의 종"(사 42:1)에 대해 예언했는데, 이는 곧 메시아에 대한 기대로 이어졌습니다. 예루살렘이 함락당한 모습을 보며 낙심했던 예레미아는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애 3:22)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의 함락은 슬픈 일이지만, 그럼에도 살아남은 자가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긍휼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처럼 멘붕의 시대는 곧 하나님을 깊이 알게 되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멘붕은 고통스러운 경험이지만, 현실을 바꾸는 생각이 탄생하는 계기이기도 합니다. 부디 이번 기회가 낭비되지 않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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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한국에게 구하시는 것

카테고리 없음 2012. 12. 21. 03:15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속한 집단에 따라 다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 6:4-5).

하지만, 이는 이스라엘이 그분에 속한 민족이었기 때문이고, 아직 하나님이 누구신지 모르는 사람에게 무턱대고 이를 요구하기는 힘듭니다. 그에 비해 하나님이 온 인류에게 주신 명령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 6:8).

이는 모든 "사람"에게 주신 명령이고, 따라서 우리가 어느 나라에 살던, 우리가 실천해야 할 삶의 목표이며 우리가 속한 사회를 평가하는 기준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에 기초해서 한국 사회를 평가해 본다면 어떨까요.

1.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공의(또는 정의 justice)가 없다는 점입니다. 한국은 20세기 들어 왕정이 식민정으로, 식민정이 민간정부를 거처 군정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나라가 멸망하도록 이끈 사람, 다른 사람을 핍박한 사람, 개인의 이익을 위해 집단에 해를 끼친 사람들이 대부분 처벌되지 않았습니다. 그에 비해 독립을 위해 힘쓴 사람, 공동체를 위해 많은 희생을 한 사람들은 대부분 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물론 국가유공자에 대한 포상이 있긴 하지만, 독립유공자의 자녀들이 대부분 가난하게 산다는 소식을 접하고 보면 과연 우리가 이들의 희생에 대해 제대로 보상하는지 의문이 듭니다). 이처럼 각 사람이 받아야할 상과 벌을 받지 않는 현실은 우리가 얼마나 정의로부터 먼 지를 잘 보여줍니다. 게다가 오늘날 한국의 사법체제는 부와 권력을 쥔 사람에게는 관대하기에, 웬만한 대기업 총수는 웬만한 잘못을 저질러도 대부분 감옥에 가지 않습니다. 이러한 솜방망이 처벌이 가능한 원인은 부자와 법집행자들 사이의 커넥션이 있기 때문인데, 이에 대한 수많은 의혹제기에도 불구하고 이를 조사하는 일 조차 적다는 사실은 불의를 보호하기 위한 불의가 처벌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2. 한국 사회의 또 다른 문제는 인자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인자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공의는 부자와 가난한자에게 똑같이 적용되지만, 인자는 특히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에 대한 보호를 뜻합니다. 한국은 치열한 경쟁을 당연시하기 때문에 경쟁에 뒤쳐진 저학력, 저소득층을 깔보고, 이들의 어려움을 완화하려는 노력이 부족합니다. 또한 곳곳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재개발 사업 때문에 가난한 사람은 일터나 삶의 보금자리를 잃고 쫓겨날 수 밖에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정말로 한국이 인자를 사랑하는 나라라면 우리는 자신을 보호할 수 없는 어린이들이 안심하고 즐겁게 생활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할텐데, 지금 한국의 어린이들은 매우 어린 나이부터 감당하기 힘든 경쟁에 내몰려서 아동기를 뺏긴 상태입니다. 이렇게 자라난 아이가 어른이 되서도 인생이 공허하다고 느끼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는 긍휼의 마음으로 자연까지 품을 수 있습니다. 수많은 공사는 자연을 병들게 하고, 말못하는 동물과 식물은 인간의 탐욕에 희생되어 죽어갑니다. 과연 이러한 현실을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공의는 그냥 기준을 따르기만 하면 되지만, 인자는 적극적이고 열정적으로 추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만약 한국이 인자를 사랑하는 나라로 거듭나지 않는다면 한국의 불행은 끝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3. 한국 사회는 하나님을 향한 겸손한 태도를 잃었습니다. 이는 유럽의 상황과 매우 유사합니다. 많은 유럽국가는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지만,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교만한 태도로 인간의 낙원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이러한 자신들의 모습에 큰 자부심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 결과 이들이 만들어낸 것은 부유하고 자유롭지만 많은 사람이 불행하게 살아가는 사회입니다. 유럽인의 4분의 1이 정신질환을 앓고, 고민이 없을 것 같은 유럽국가에 자살율이 높다는 사실은 하나님 없는 낙원에 사는 유럽인들의 비극을 잘 보여줍니다. 한국은 유럽에 비해 공의나 인자가 많이 부족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겸손의 부족이라는 점에서는 유럽에 뒤지지 않습니다. 지금 한국은 기독교, 특히 개신교에 대한 반감이 엄청납니다. 그 원인이 무엇이든, 하나님이 이를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러한 상황을 바꾸려면 그리스도의 몸이 먼저 반대 정신(opposite spirit)으로 본을 보여야 합니다. 즉, 세상 사람들이 교만하여 하나님을 멀리할 때,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만 찾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교회들 조차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성도 숫자, 말씀 잘 전하는 목회자, 심지어 돈과 권력을 자랑하니 어찌 이 사회가 겸손한 사회로 바뀔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본다면 대통령 선거 한 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사회 곳곳에서 한국을 탈바꿈하기 위해 활동하고, 이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할 필요성이 분명해집니다. 저는 이제 한국을 위해 기도하기로 결심합니다. 한국이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나라가 되는 날을 보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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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점에 선 한국 교회

카테고리 없음 2012. 12. 21. 03:14

이번 선거 결과를 지켜보며 느낀 사실은, 지금 한국 사회가 전환점에 서있을 뿐 아니라 한국 교회가 전환점에 서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처음 유럽에 온 90년대엔,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소개하면 많은 크리스천은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엄청난 부흥"에 대해 물었습니다. 사실 그때도 한국교회가 부흥하는 시절은 아닌데, 어쨌든 외국인들에겐 그런 인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이젠 외국인이 보기에도 한국교회는 더 이상 부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명백해진것입니다.

문제는 부흥이 사라지면서 한국 교회는 장년층은 여전하지만 청년의 유입은 적고, 따라서 전체적인 평균 연령이 높아졌다는 점입니다. 이는 곧 교회의 보수화되고 이어졌고, 나이 많은 사람들이 듣기 좋은 소리가 곧 교회의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문화적 변화는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지금 상황이 지속된다면 한국교회는 30년 내에 젊은이는 찾아보기 힘들고 노인만 남은 상황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그렇게 비웃던 유럽교회의 상황이 된다는 말이죠(그런데, 지금 유럽교회는 아주 전통적인 교회를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교회는 청장년의 균형이 잘 맞습니다. 젊은이들이 꾸준히 교회로 유입되기 때문이죠).

이처럼 활기를 잃은 한국 교회는 점차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 보다는 개인과 개교회의 성공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고, 결국 소금의 짠맛을 잃게 되었습니다.

지금 한국의 많은 젊은이들은 기독교에 적대적일 뿐 아니라 기독교가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의 한부분이라고 믿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가 아무리 용을 써도 청년부가 계속 줄어드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합니다. 문제는 "교회가 문제다"라는 이들의 지적이 그리 크게 틀리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우리 사회의 지도인사 가운데는 기독교인이 많은데, 이들이 문제를 일으킬때마다 이들의 출석교회까지 언급되니,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게다가 대형교회들의 편파적인 정치참여와 세습문제, 한기총의 파행사태 등이 알려지면서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공의로운 하나님을 믿는 사랑이 넘치는 사람들"이라는 말을 믿기 힘들어 합니다.

베드로전서 4장 17절은 하나님의 심판이 하나님의 집에서 먼저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나라를 축복하실 때나 심판하실 때, 교회에서 먼저 하십니다. 그래야 교회가 먼저 축복의 통로가 되고,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경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이미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우리가 할일은 우리의 잘못을 시인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마땅히 살아야 할 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한국 교회는 사회를 향해 선지자의 목소리를 높일 수 있고, 그럴 때 한국 사회는 교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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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되 보이는 성경 구절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카테고리 없음 2012. 12. 21. 03:13

때때로 성경을 읽다보면 모순되는 구절이 나옵니다. 애를 들어, 한쪽에서는 모든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왔기에 권세에 순종해야 한다는 구절이 보이고, 다른 쪽에서는 권세와 맞서 싸워야 한다는 구절이 보입니다. 한쪽에서는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고 행위는 무의미하다는 구절이 보이고, 다른 쪽으로는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구절이 보입니다.

이처럼 모순되는 구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이에 대해 가톨릭 교회는 전통을 해석의 근거로 삼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몸은 오랜 세월을 거치며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알고, 따라서 이렇게 그리스도의 몸에 전해지는 가르침이야말로 성경을 해석하는 중요한 기준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전통을 중시하면 잘못된 전통이 생겨날 경우 이를 바로잡을 길이 없습니다. 실제로 중세 교회는 많은 잘못을 저질렀는데, 이 대부분은 잘못된 전통에서 왔습니다.

이러한 문제점을 출발하는데서 시작한 개신교는 전통이라는 개념을 거부하고 논리를 중요시합니다. 즉, 성경을 논리적으로 해석했을 때 나오는 결론이 올바른 성경의 뜻이라는 개념입니다. 이는 교회 안의 비성경적인 전통을 제거하는데 성공적이었지만, 앞서 언급한 모순되는 구절을 해석할때는 한계에 부딪칩니다. 예를 들어, 99%의 성경구절이 한쪽 의미라고 할지라도, 1%가 반대 의미라면 논리적 접근으로는 해석이 불가능합니다(물론 신학자들은 이러한 불가능에 도전하길 포기하지 않죠).

성경 구절이 모순되지는 않지만 현실적으로 적용이 어려운 구절의 해석에서도 올바른 해석은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성경은 분명히 간음의 경우를 제외한다면 이혼을 금하는데, 지금처럼 이혼이 많은 시대에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할지 궁금해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바울은 "사랑의 빚 이외에는 빚을 지지 말자"고 했는데, 이 말이 학자금 융자, 주택자금 융자에 대해서도 적용되는지에 대해 이견이 분분합니다. 뭐 "문자적 해석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이는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문제입니다. 대학을 다니느라 학자금 융자를 받으려는 사람에게 "성경은 빚지지 말라고 했는데, 빚을 지다니 너는 죄를 짖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정말 올바른 행동일까요? 이러한 태도는 정확히 바리새인의 태도와 일치합니다. 그들이 간음한 여자를 예수님앞에 끌고와 돌로 치려고 할 때, 이들은 율법을 문자적으로 따랐을 뿐입니다. 이에 비해 예수님은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사실은 인정하였지만, 긍휼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진리는 문자를 뛰어넘은 것이었죠.

저도 어려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단, 내가 모든 답을 안다는 태도는 결국 교만과 자기의로 이끌고, 따라서 겸손히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한다는 것만 압니다. 하나님은 겸손히 그분의 지혜를 구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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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지도자를 대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세

카테고리 없음 2012. 12. 21. 03:13

크리스천은 땅에 살지만 하늘나라 시민입니다. 따라서 그는 이중국적을 소유했다고 로 수 있죠. 그렇기 때문에 그는 세상 사람과 동일한 의무, 권리를 지닐 뿐 아니라 세상 사람과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여야 합니다.

정치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투표권을 행사하고 정치적 자유를 누립니다. 하지만 그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답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바울은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롬 13:1)고 말했습니다. 이는 정치권력이 단지 인간의 뜻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역사를 움직이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이 말을 쓸 당시 로마의 황제는 폭군으로 유명한 네로였습니다. 이처럼 끔찍한 지도자 조차 바울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인 것이죠.

하지만 이 말은 정치지도자는 하나님이 세우셨으니 무조건 비판하면 안되고 그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바울은 그의 사상사를 통해 여러번 "정사와 권세"에 대해 언급했고, 그 대부분은 정사와 권세는 나쁘며, 우리는 이들을 이겨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과연 이 정사와 권세는 누구입니까? 월터 윙크는 "정사와 권세까지 곧 영적인 실체와 정치적 실체의 결합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좀 어려운 개념이긴 하지만, 쉽게 말해 악한 영적 권세는 악한 정치적 체제와 분리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싸움은 영적 전쟁일 뿐 아니라 불의한 정치세력에 대한 투쟁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정치지도자에게 복종해야 할 뿐 아니라 정치지도자의 잘못을 꾸짖는 역할도 해야 합니다. 이는 모순인데, 사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항상 모순되기 마련입니다.

이제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되면 이에 대한 환호와 반발이 동시에 터져나올텐데,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다른 사람과 동일하게 반응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권위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이 권력이 악의 통로가 되지 않도록 견제하고 감시하며, 때로는 말과 행동으로 맞서 싸우는 용기가 필요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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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를 향한 하나님의 보호

카테고리 없음 2012. 12. 21. 03:11

얼마전 모 후보 광고에 나오는 애국가를 들으며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구절이 가슴에 와 닿더군요. 우리는 이 나라가 우연히 이러한 방향으로 흘러왔다고 생각하거나, 우리의 노력으로 이러한 모습을 띄게 되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한국이라는 나라는 하나님의 마음에서 생겨난 나라고, 하나님은 한국을 자식같이 사랑하십니다. 한국이 잘못된 길로 갈때 그분은 마음아파하시고, 올바른 길로 돌아올 때 기뻐하십니다.

옛 이스라엘의 선지자 요나는 사악한 도성 니느웨를 향해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였고, 이러한 심판이 일어나지 않자 하나님께 항의합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박넝쿨을 보내시고, 박넝쿨이 죽자 우울해하는 요나에게 나타나셔서, "너는 하루살이 박넝쿨이 죽어도 슬픈데, 나는 사람이 많이 사는 이 성이 파괴될 때 기쁘겠느냐?"는 요지의 말씀을 하십니다.

저는 여기서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배웁니다. 각 나라가 올바르게 향하고, 재앙이 아니라 축복을 경험하기 원하는 마음. 때로 잘못된 길로 가는 나라에 경고를 보내시지만 이러한 경고를 실천으로 옮기기 원치 아니하시는 마음.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 때문에 나라들은 망하지 않고 수백년 수천년을 지속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그리스도인이 많은 나라 뿐 아니라 니느웨 처럼 하나님을 아는 백성이 거의 없는 나라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처음 애국가의 가사가 완성될 당시 한국(조선)의 그리스도인은 전체 인구의 10% 미만이었겠죠.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우리 조상들은 우리나라를 사랑하사 우리나라를 지켜주시는 분의 존재를 믿고 그분께 이 나라의 미래를 맡겼습니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아멘. 한국을 사랑하신다 하나님의 보호에 이 나라를 올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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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묵상

카테고리 없음 2008. 3. 23. 12:44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빌3:10)


제가 여행을 많이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제가 여행을 좋아하리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저는 여행을 싫어합니다. 저와 함께 생활을 해 본 사람들은 제가 얼마나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며, 때때로 하루종일 같은 장소를 떠나지 않는지 직접 목격했을 것입니다.

여행을 좋아하진 않지만, 94년에 혼자 유럽 여행을 시작한 이후로 저는 운명인 듯 수많은 곳을, 그것도 대부분 혼자서 여행했습니다. 처음에는 여행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 몰라 봐야 될 것을 못보고 지나치기도 했고 (제가 최초로 방문한 유럽도시인 던 런던에선 그 유명하다는 빅벤, 런던브리지, 버킹검 궁 등을 전혀 못 보았습니다), 돈 아낀다고 밤기차만 타다가 폐인의 삶을 경험하기도 하고... 뭐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엉성한 실수를 많이하고 다녔죠.

그래서 요즘은 여행을 다닐때, 지금까지 익힌 모든 여행 지식을 최대한 발휘해서 가장 효율적이고도 쾌적한 여행이 되도록 신경을 많이 씁니다. 예를 들어, 여행을 할때는 베낭보다는 바퀴가 달린 가방이 유용하다던지, 숙소는 조금 비싸도 관광 중심지에 있는 곳에 위치한 것이 결국 더 경제적이다 (외곽에 있는 숙소까지 가려면 차비가 들기 때문에)는 등 체험으로 터득한 수많은 지식에 의존해서 계획을 세우고 움직이게 되죠.

그런 데 이렇게 경험을 살려 여행을 하면 점차 여행하기가 편해져야 하는데, 실제로는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사람이 나이가 드니까 더 편한 것을 찾게 되고, 따라서 20대 초반에 여행할 땐 당연히 감수해야할 불편으로 생각하던 것들이 이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불쾌로 느껴지게 되는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이전에는 여행할 때 늘 유스 호스텔만 이용했습니다. 유스호스텔은 대부분 기숙사 형태로 한 방에 많은 침대가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이런 숙소에 머무는 것이 정말 힘든 일로 느껴지더군요. 우선 여러 사람이 방을 쓰니까 privacy가 전혀 없는 것은 당연하고, 잠자고 일어나는 시간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고, 다른 사람들을 따라야 하고, 많은 경우 같이 방을 쓰는 사람들이 심한 몸냄새가 나기 때문에 (서양 사람들 원래 체취가 강한데다가, 여행하고 안씻고 자는 사람들이 많아서) 거의 방에 들어가기가 싫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도 Youth Hostel에서 자는 것이 가장 싼 호텔의 싱글 룸에서 자는 것보다 반 값 정도밖에 안되기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Youth Hostel에 머무는 경우가 많죠...

이탈리아 페루자에 머물다가 튀니지로 비자 여행을 갈 때도 그랬습니다. 튀니지로 직접 간 것이 아니라 로마, 나폴리, 시칠리아를 거쳐서 시칠리아에서 배로 갔는데, 로마와 나폴리에서는 유스호스텔을 이용했습니다. 뭐 나름대로 괜챦은 유스호스텔들이었는데, 위에서 언급한 어려움들 때문에 마음이 그리 편하지는 않았습니다. 특히 privacy가 없으니 자연히 묵상, 기도등 경건의 시간 갖기도 쉽지 않더군요. '이제 성경 읽어야지' 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불끄면 그만이고, 기도하려고 해도 다들 깨서 떠들면 기도하기 어렵기 때문에 자연히 경건의 시간이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며칠 지내고 나니까 마음이 많이 우울해 지더군요. '아, 나는 왜 이 나이가 되서도 이렇게 싸구려 여행을 해야 하는 걸까? 왜 나는 다른 사람들 처럼 호텔에서 우아하게 자면 안되나? 왜 나는 늘 혼자서 다녀야 하는 걸까?' 로마에서 바티칸 박물관도 가보고, 나폴리 근처 폼페이 유적도 방문했지만, 마음은 계속 어두웠습니다. '나는 왜 한 곳에 정착할 수 없나? 언제까지 이렇게 떠도는 인생이어야 하는가...'

나폴리에서 시칠리아까지는 기차로 이동하기로 했습니다. 원래는 밤기차를 잘 안타는데, 워낙 돈을 아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들어서 어쩔 수 없이 타게 되었습니다.

제가 탄 기차는 로마에서 나폴리를 거쳐 시칠리아로 가는 기차였습니다. 기차가 나폴리에 도착했을 때, 차안은 사람이 가득하더군요. '혹시 자리를 잡지 못해 밤새 서서 가면 어떻하나' 생각하니 바짝 긴장이 되었습니다. 저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한칸 한칸 앞차로 옮겨가며 자리를 찾았습니다. 상당히 앞까지 갔을 때 겨우 빈자리 하나를 발견하고 앉았습니다. 그러나 안심도 잠깐, 검표원이 표를 보더니 '이 차량은 팔레르모로 안가니 팔레르모에 가려면 뒤쪽으로 옮겨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기차가 중간에 갈라져 한쪽은 시라쿠제로 가고 한쪽은 팔레르모로 가게 되어있던 것입니다. 그래도 생각해보니 이태리 반도 남쪽 끝에서 배에 기차를 싣게 될 때 까지는 앉아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아 잠시나마 눈을 붙여보기로 했습니다.

어느 순간, 눈을 떠보니 기차가 정차해 있는데 움직일 생각을 안하는 것이었습니다. '아, 여기서 기차를 배에 싣는구나' 생각이 들더군요. 세벽 한시. 정신을 차리고 짐을 챙겨 뒷쪽으로 옮겨갔습니다. 칸마다 정신없이 자고 있는 사람들, 자리는 없고, 더욱 불안하게 만드는 건 복도에 서있는 사람들... '사람들이 이렇게 서있는데 자리가 있겠나' 싶더군요. 한참을 가다가 포기하고 복도에 있는 간의 의자를 내려 앉았습니다. 이렇게 라도 가야겠다... 싶어서요. 그런데 그런 가운데서도 잠을 청하려고 노력해 봤지만 불가능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의자는 말 그대로 간의의자라 쿠션이 하나도 없어 앉기가 매우 불편했고, 발과 엉덩이 외에 몸을 지탱해주는 부분이 전혀 없었고, 무엇보다도 머리를 기댈 곳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머리를 기댈 곳이 없으니까 잠을 전혀 잘 수가 없더군요.

막 괴로워하고 있는데,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마 8:20)' 아, 머리둘 곳의 중요성을 그렇게 절감해 보긴 처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그렇게 잠못 이루어 고생하던 시간은 바로 고난 주간의 금요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밤새 고초를 당하고, 엄청나게 매를 맞고, 못먹고, 못자고, 이제 십자가에 달리시는 바로 그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내가 내 신세에 대해 한탄하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머리둘 곳이 없음을 말씀하신 것은, 어떤 서기관이 책임지지 못할 헌신의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마8:19)


그 서기관은 아마도 예수님을 보며 감동을 받아 예수님께 자신의 삶을 헌신해야 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댓가 지불은 고려하지 않고 헌신의 멋있는 모습만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그런 식의 헌신은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고, 오히려 만류해야 하는 종류의 헌신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삶이 사실은 얼마나 힘든가를 극적인 언어로 표현하였던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저도 한국에 있을 때, 여러번 헌신에 관한 설교를 했던 생각이 납니다. 때로는 학생들이 '헌신'이라는 주제에 대해 심한 거부감을 보이는 것을 보면서도, '내가 정말 마음을 담아 가르칠 수 있는 주제는 이것뿐이다'는 심정으로 헌신에 대해 강의하고, 헌신하도록 도전했습니다.

헌신이 많은 댓가지불을 요한다는 것은 저 자신의 삶을 통해서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습니다. 96년 영국에서 머물 시간이 다 끝났을 때, 전 한국에 돌아가 마지막 학기를 마치고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프랑스의 베이스와 접촉하게 되었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느꼈기에 내 계획을 포기하고 믿음으로 주님의 뜻을 따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때 저의 재정상태는 정말 바닥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잠시 영국에 있을 생각으로 나왔기 때문에, 프랑스에 체류할 재정은 전혀 없었습니다. '과연 프랑스에 건너가면 무슨 돈으로 사나?' 하는 질문은 저를 괴롭혔습니다. 몇년 전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완전히 가세가 기운 상태에서 몇년을 살다 보니, '생존'이라는 것은 대단히 절박한 문제였던 것입니다.

98년 한국에서 간사로 위탁하기전에도 사정은 비슷했습니다. 이제 대학을 거의 마치고, 무언가 할 일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간사를 하게 되면 가정에 도움을 못 드리는 것은 물론이고, 저 자신도 다시 한 번 생존의 어려움을 겪어야 하였던 것입니다. 그나마 학생때는 아르바이트 하면서 용돈이라도 벌어 썼는데, 간사를 하게 되면 그나마 수입이 없어지고, 어떻게 먹고 살지가 정말 막막했습니다.

그 때 제가 늘 묵상하던 것은 감옥에 갇힌 바울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로마 감옥에선 먹을 것을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즉, 감옥은 사람을 가둬두기만 하는 곳이었고, 음식은 죄수의 가족이 공급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빌립보서를 보면, 바울이 감옥에 갇혀있는데, 그와 관련있던 모든 교회, 개인들이 그를 잊었다고 나옵니다. 즉, 바울은 감옥에 갇혀 꼼짝 없이 굶어죽게 생겼다는 것이지요. 이 모습을 보며, '정말 바울도 나랑 상황이 비슷했다'고 느끼곤 했습니다.

빌립보서에는 바울의 유명한 말이 나옵니다. '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4:13) 그런데 그는 바로 앞구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4:12) 다른 말로 하면, 그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가난도 이겨낼 수 있고, 부유해도 타락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감옥에 갇힌 바울이, 누군가가 자신을 기억해 주지 않는다면 굶어죽을 수 밖에 없는 형편인데도 '내가 비천에 처할줄도 알고...'라고 했다는 것은, 간사 초년생인 저에게 참 많은 도전이 되었습니다. 아, 나의 경제적 어려움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바울은 정말 굶어죽는 위기 앞에서도 '기뻐하라!(4:4)'고 말할 수 있었는데...

생각해보면 지금은 프랑스에 있을 때나 한국에서 처음 간사생활을 할때에 비하면 훨씬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조금만 생활의 질이 떨어져도 하나님 앞에서 불평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깊이 묵상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체우겠다'(골 1:24)는 바울의 말에 무한한 감동을 느끼던 이전의 제모습이 어디로 갔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고난을 피하고, 안락한 삶만을 추구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 또한 체험할 수 없게될 것입니다. 바울의 말대로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고난'은 분리될 수 없는, 한 덩어리입니다.

고난을 주신 주님께 감사 드립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도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함으로 그분의 부활의 권능 또한 누리게 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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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와 진리

카테고리 없음 2008. 3. 9. 11:41
비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을 비난하는 근거로 쓰는 말 중, "그리스도인은 교만하고 일방적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진리를 소유했다는 확신이 있고, 따라서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진리를 모르는 사람"으로 대하기가 쉽지요. 우리가 조심하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을 "교만한 사람"으로 인식하기 마련입니다.

진리를 안다고 꼭 교만할 필요는 없지만, 많은 그리스도인은 실제로 그러한 모습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동성애자가 많은 미국에서 많은 그리스도인은 동성애에 대한 비난을 쏟아놓으며 "동성애자는 지옥간다. 하나님은 동성애자를 혐오한다"는 말을 하길 좋아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동성애자가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리를 주신 것은 우리가 남을 판단하기 위함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우선 우리 자신이 진리를 따라 살기 위한 것입니다. 세상은 진리를 모르고, 따라서 그들의 삶에는 많은 잘못이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정죄한다면 그들은 우리가 하는 모든 말에 대해 귀를 막을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말합니다 (요 1:14). 우리는 진리를 말할 뿐 아니라, 은혜를 베풀어야 합니다. 바울은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엡 4:15). 아무리 맞는 말이라도, 사랑이 없이 말한다면 듣는 사람에게 해를 끼칠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진리와 함께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베풀지 않는다면, 아무리 진리를 말한다 할찌라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임무를 실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받아, 은혜와 진리를 함께 보이는 교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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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과 에서

카테고리 없음 2008. 3. 2. 18:53
사람들은 야곱에 대해 생각할 때 "사기꾼"의 이미지를 먼저 떠올립니다. 그는 아버지를 속여 형의 축복을 뺏은 인물로 유명하고, 따라서 각종 술수에 능한 사람이라는 인상이 강합니다.

하지만 이는 성경이 말하는 야곱의 모습과는 매우 다릅니다. 성경은 야곱에 대해 "조용한 사람" (창 25:27 개정개역)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사람들 앞에 나서서 남의 일에 참견하거나 이익에 밝은 사람이 아니라 조용히 장막에 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는 전형적인 사기꾼의 모습과는 매우 다릅니다.

야곱은 장막에 거하며 아버지가 들려주는 가문의 전통에 대해 들었을 것입니다. 이삭은 그에게 하나님이 갈데아 땅에 살던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큰 민족을 만드실 것을 약속하셨고,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이 있었지만 약속을 타고난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특권을 얻었다는 사실에 대해 설명했을 것입니다.

야곱은 이삭의 설명을 듣고 생각에 잠겼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특권은 아브라함에서 이삭으로, 그리고 장자인 에서형에게 이어지겠구나.' 그는 생각했겠죠. 하지만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특권을 누리기 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에서의 하나님"이 아닌 "아브라함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부르고 싶을 것입니다. 하지만 단 몇 분 늦게 태어났다는 이유로 형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자신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 가슴 아팠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기회가 옵니다. 그 기회는 그들이 살던 지역에 기근이 든 것이죠 (창 26:1). 에서는 들에서 사냥을 하다가 기근 때문에 사냥감을 찾지 못하고 허기져 돌아옵니다. 야곱은 장막에 거했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남은 식량이 어디있는지 알았고, 이 식량으로 죽을 만듭니다. 시장했던 에서는 야곱의 팥죽을 보더니 "나에게 달라"고 요구합니다. 야곱은 "그러면 대신 장자의 명분을 나에게 달라"고 말합니다. 에서는 "배고파 죽겠는데 장자의 명분이 무슨 소용 있겠냐"며 순수히 거래에 응합니다. 이로 인해 야곱은 장자의 명분을 얻고 에서는 죽 한 그릇을 얻습니다. 성경은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고 말합니다 (창 25:34).

에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특권을 타고 났지만, 이러한 귀중한 특권을 팥죽 한그릇에 팔아 버리고도 전혀 아쉬워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가 철저하게 육신의 생각을 따라 산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영적인 일의 가치를 모릅니다. 이런 사람은 기도, 묵상, 하나님과 나누는 교제, 성도간의 교제, 섬김, 전도 등의 가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배고파 죽겠는데 영적인 활동이 무슨 소용 있겠냐"며 육신의 쾌락만을 추구하고 영적인 유산을 팔아버리지요. 성경은 우리가 이러한 삶을 살지 않도록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고 경고합니다 (히 12:16).

영적인 유산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자산입니다. 많은 경우에 이러한 유산은 육신의 쾌락을 포기하는 댓가를 지불해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는 야곱이 선택한 길이었죠. 그에 비해 육신의 쾌락을 선택한다면 영적인 유산은 잃기 마련입니다. 이는 에서의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롬 9:13)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야곱처럼 육신의 쾌락을 포기하고 영적인 유산을 추구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희생을 기쁘게 받으십니다. 그에 비해 육신의 쾌락을 위해 영적인 유산을 포기한다면,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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