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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3.23 부활절 묵상
  2. 2007.12.17 불의 시련

부활절 묵상

카테고리 없음 2008. 3. 23. 12:44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빌3:10)


제가 여행을 많이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제가 여행을 좋아하리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저는 여행을 싫어합니다. 저와 함께 생활을 해 본 사람들은 제가 얼마나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며, 때때로 하루종일 같은 장소를 떠나지 않는지 직접 목격했을 것입니다.

여행을 좋아하진 않지만, 94년에 혼자 유럽 여행을 시작한 이후로 저는 운명인 듯 수많은 곳을, 그것도 대부분 혼자서 여행했습니다. 처음에는 여행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 몰라 봐야 될 것을 못보고 지나치기도 했고 (제가 최초로 방문한 유럽도시인 던 런던에선 그 유명하다는 빅벤, 런던브리지, 버킹검 궁 등을 전혀 못 보았습니다), 돈 아낀다고 밤기차만 타다가 폐인의 삶을 경험하기도 하고... 뭐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엉성한 실수를 많이하고 다녔죠.

그래서 요즘은 여행을 다닐때, 지금까지 익힌 모든 여행 지식을 최대한 발휘해서 가장 효율적이고도 쾌적한 여행이 되도록 신경을 많이 씁니다. 예를 들어, 여행을 할때는 베낭보다는 바퀴가 달린 가방이 유용하다던지, 숙소는 조금 비싸도 관광 중심지에 있는 곳에 위치한 것이 결국 더 경제적이다 (외곽에 있는 숙소까지 가려면 차비가 들기 때문에)는 등 체험으로 터득한 수많은 지식에 의존해서 계획을 세우고 움직이게 되죠.

그런 데 이렇게 경험을 살려 여행을 하면 점차 여행하기가 편해져야 하는데, 실제로는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사람이 나이가 드니까 더 편한 것을 찾게 되고, 따라서 20대 초반에 여행할 땐 당연히 감수해야할 불편으로 생각하던 것들이 이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불쾌로 느껴지게 되는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이전에는 여행할 때 늘 유스 호스텔만 이용했습니다. 유스호스텔은 대부분 기숙사 형태로 한 방에 많은 침대가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이런 숙소에 머무는 것이 정말 힘든 일로 느껴지더군요. 우선 여러 사람이 방을 쓰니까 privacy가 전혀 없는 것은 당연하고, 잠자고 일어나는 시간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고, 다른 사람들을 따라야 하고, 많은 경우 같이 방을 쓰는 사람들이 심한 몸냄새가 나기 때문에 (서양 사람들 원래 체취가 강한데다가, 여행하고 안씻고 자는 사람들이 많아서) 거의 방에 들어가기가 싫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도 Youth Hostel에서 자는 것이 가장 싼 호텔의 싱글 룸에서 자는 것보다 반 값 정도밖에 안되기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Youth Hostel에 머무는 경우가 많죠...

이탈리아 페루자에 머물다가 튀니지로 비자 여행을 갈 때도 그랬습니다. 튀니지로 직접 간 것이 아니라 로마, 나폴리, 시칠리아를 거쳐서 시칠리아에서 배로 갔는데, 로마와 나폴리에서는 유스호스텔을 이용했습니다. 뭐 나름대로 괜챦은 유스호스텔들이었는데, 위에서 언급한 어려움들 때문에 마음이 그리 편하지는 않았습니다. 특히 privacy가 없으니 자연히 묵상, 기도등 경건의 시간 갖기도 쉽지 않더군요. '이제 성경 읽어야지' 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불끄면 그만이고, 기도하려고 해도 다들 깨서 떠들면 기도하기 어렵기 때문에 자연히 경건의 시간이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며칠 지내고 나니까 마음이 많이 우울해 지더군요. '아, 나는 왜 이 나이가 되서도 이렇게 싸구려 여행을 해야 하는 걸까? 왜 나는 다른 사람들 처럼 호텔에서 우아하게 자면 안되나? 왜 나는 늘 혼자서 다녀야 하는 걸까?' 로마에서 바티칸 박물관도 가보고, 나폴리 근처 폼페이 유적도 방문했지만, 마음은 계속 어두웠습니다. '나는 왜 한 곳에 정착할 수 없나? 언제까지 이렇게 떠도는 인생이어야 하는가...'

나폴리에서 시칠리아까지는 기차로 이동하기로 했습니다. 원래는 밤기차를 잘 안타는데, 워낙 돈을 아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들어서 어쩔 수 없이 타게 되었습니다.

제가 탄 기차는 로마에서 나폴리를 거쳐 시칠리아로 가는 기차였습니다. 기차가 나폴리에 도착했을 때, 차안은 사람이 가득하더군요. '혹시 자리를 잡지 못해 밤새 서서 가면 어떻하나' 생각하니 바짝 긴장이 되었습니다. 저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한칸 한칸 앞차로 옮겨가며 자리를 찾았습니다. 상당히 앞까지 갔을 때 겨우 빈자리 하나를 발견하고 앉았습니다. 그러나 안심도 잠깐, 검표원이 표를 보더니 '이 차량은 팔레르모로 안가니 팔레르모에 가려면 뒤쪽으로 옮겨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기차가 중간에 갈라져 한쪽은 시라쿠제로 가고 한쪽은 팔레르모로 가게 되어있던 것입니다. 그래도 생각해보니 이태리 반도 남쪽 끝에서 배에 기차를 싣게 될 때 까지는 앉아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아 잠시나마 눈을 붙여보기로 했습니다.

어느 순간, 눈을 떠보니 기차가 정차해 있는데 움직일 생각을 안하는 것이었습니다. '아, 여기서 기차를 배에 싣는구나' 생각이 들더군요. 세벽 한시. 정신을 차리고 짐을 챙겨 뒷쪽으로 옮겨갔습니다. 칸마다 정신없이 자고 있는 사람들, 자리는 없고, 더욱 불안하게 만드는 건 복도에 서있는 사람들... '사람들이 이렇게 서있는데 자리가 있겠나' 싶더군요. 한참을 가다가 포기하고 복도에 있는 간의 의자를 내려 앉았습니다. 이렇게 라도 가야겠다... 싶어서요. 그런데 그런 가운데서도 잠을 청하려고 노력해 봤지만 불가능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의자는 말 그대로 간의의자라 쿠션이 하나도 없어 앉기가 매우 불편했고, 발과 엉덩이 외에 몸을 지탱해주는 부분이 전혀 없었고, 무엇보다도 머리를 기댈 곳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머리를 기댈 곳이 없으니까 잠을 전혀 잘 수가 없더군요.

막 괴로워하고 있는데,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마 8:20)' 아, 머리둘 곳의 중요성을 그렇게 절감해 보긴 처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그렇게 잠못 이루어 고생하던 시간은 바로 고난 주간의 금요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밤새 고초를 당하고, 엄청나게 매를 맞고, 못먹고, 못자고, 이제 십자가에 달리시는 바로 그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내가 내 신세에 대해 한탄하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머리둘 곳이 없음을 말씀하신 것은, 어떤 서기관이 책임지지 못할 헌신의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마8:19)


그 서기관은 아마도 예수님을 보며 감동을 받아 예수님께 자신의 삶을 헌신해야 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댓가 지불은 고려하지 않고 헌신의 멋있는 모습만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그런 식의 헌신은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고, 오히려 만류해야 하는 종류의 헌신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삶이 사실은 얼마나 힘든가를 극적인 언어로 표현하였던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저도 한국에 있을 때, 여러번 헌신에 관한 설교를 했던 생각이 납니다. 때로는 학생들이 '헌신'이라는 주제에 대해 심한 거부감을 보이는 것을 보면서도, '내가 정말 마음을 담아 가르칠 수 있는 주제는 이것뿐이다'는 심정으로 헌신에 대해 강의하고, 헌신하도록 도전했습니다.

헌신이 많은 댓가지불을 요한다는 것은 저 자신의 삶을 통해서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습니다. 96년 영국에서 머물 시간이 다 끝났을 때, 전 한국에 돌아가 마지막 학기를 마치고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프랑스의 베이스와 접촉하게 되었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느꼈기에 내 계획을 포기하고 믿음으로 주님의 뜻을 따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때 저의 재정상태는 정말 바닥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잠시 영국에 있을 생각으로 나왔기 때문에, 프랑스에 체류할 재정은 전혀 없었습니다. '과연 프랑스에 건너가면 무슨 돈으로 사나?' 하는 질문은 저를 괴롭혔습니다. 몇년 전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완전히 가세가 기운 상태에서 몇년을 살다 보니, '생존'이라는 것은 대단히 절박한 문제였던 것입니다.

98년 한국에서 간사로 위탁하기전에도 사정은 비슷했습니다. 이제 대학을 거의 마치고, 무언가 할 일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간사를 하게 되면 가정에 도움을 못 드리는 것은 물론이고, 저 자신도 다시 한 번 생존의 어려움을 겪어야 하였던 것입니다. 그나마 학생때는 아르바이트 하면서 용돈이라도 벌어 썼는데, 간사를 하게 되면 그나마 수입이 없어지고, 어떻게 먹고 살지가 정말 막막했습니다.

그 때 제가 늘 묵상하던 것은 감옥에 갇힌 바울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로마 감옥에선 먹을 것을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즉, 감옥은 사람을 가둬두기만 하는 곳이었고, 음식은 죄수의 가족이 공급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빌립보서를 보면, 바울이 감옥에 갇혀있는데, 그와 관련있던 모든 교회, 개인들이 그를 잊었다고 나옵니다. 즉, 바울은 감옥에 갇혀 꼼짝 없이 굶어죽게 생겼다는 것이지요. 이 모습을 보며, '정말 바울도 나랑 상황이 비슷했다'고 느끼곤 했습니다.

빌립보서에는 바울의 유명한 말이 나옵니다. '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4:13) 그런데 그는 바로 앞구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4:12) 다른 말로 하면, 그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가난도 이겨낼 수 있고, 부유해도 타락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감옥에 갇힌 바울이, 누군가가 자신을 기억해 주지 않는다면 굶어죽을 수 밖에 없는 형편인데도 '내가 비천에 처할줄도 알고...'라고 했다는 것은, 간사 초년생인 저에게 참 많은 도전이 되었습니다. 아, 나의 경제적 어려움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바울은 정말 굶어죽는 위기 앞에서도 '기뻐하라!(4:4)'고 말할 수 있었는데...

생각해보면 지금은 프랑스에 있을 때나 한국에서 처음 간사생활을 할때에 비하면 훨씬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조금만 생활의 질이 떨어져도 하나님 앞에서 불평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깊이 묵상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체우겠다'(골 1:24)는 바울의 말에 무한한 감동을 느끼던 이전의 제모습이 어디로 갔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고난을 피하고, 안락한 삶만을 추구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 또한 체험할 수 없게될 것입니다. 바울의 말대로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고난'은 분리될 수 없는, 한 덩어리입니다.

고난을 주신 주님께 감사 드립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도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함으로 그분의 부활의 권능 또한 누리게 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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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시련

카테고리 없음 2007. 12. 17. 12:03
What we call the beginning is often the end
And to make an end is to make a beginning.

-T.S. Eliot, Four Quartets


얼마전 시내에 있는 서점을 갔다가 영서 코너에서 반가운 책을 한권 발견했습니다. T.S. Eliot의 Four Quartets라는 시를 담은 시집인데, 이 시집 말고도 엘리엇의 시집 몇권이 더 보였습니다. 저는 원래 시집이나 시인에 대해 관심이 없는데, T.S. Eliot의 시 만큼은 제 마음에 와닿더군요. 물론 이 글을 읽는 분 대부분이, 'T.S. Eliot이 누군데?' 하시겠지만, 이 사람이 '사월은 잔인한 달...' 하는 구절을 썼다면 모두, '아하!' 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Four Quartets에 대해선 특별한 사연이 있습니다. 97년, 프랑스에서 1년간의 간사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입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사역했고, 열매도 많았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돌아왔지만, 한국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 건 1년 전 떠날 때 보다 더욱 어려워진 가정 형편과, 그로 인해 고생하시는 부모님, 그리고 그러한 현실이 싫어서 집 밖으로 맴돌며 집에 들어와서는 사사건건 부모님과 마찰을 빚는 내 자신의 모습뿐이었습니다. 어느 날은 쌓였던 울분이 폭발하면서 부모님앞에서 악을 쓰며 싸웠던 기억도 있습니다. 아마 내 인생에서 가장 낮은 지점이었을 것입니다...

끝이 없는 것 같은 가난, 끝이 없을 것 같은 가정 불화... 하루 하루의 삶이 고통이었고, 어디서도 소망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과연 왜 내 삶에 이런 고통이 일어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죠. 그리고 먼 옛날부터 계속되어온 이러한 고통이 앞으로 얼마나 계속될지를 알 수 없기에 고통을 이겨낼 자신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Eliot의 Four Quartets에 나오는 이 싯구가 기억이 나더군요.

To be redeemed from fire by fire...


불로부터 불에 의해 구원된다... 그때 제 마음속에 '지금 내가 당하는 고통은, 나를 고통으로부터 구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다'는 계시가 임했습니다. 즉, 하나님이 내게 이런 고통을 주시는 것은, 역설적으로, 내가 더 이상 고통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는 뜻입니다.

이 구절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그가 이 시를 쓰게 된 배경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미국인이었지만, 유럽의 문화를 너무 사랑해서 결국 영국에 귀화합니다. 그는 또한 하나님을 믿기로 결정하고 영국 국교회 교인이 됩니다. 그런데 그가 영국에 살고 있을 때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합니다. 나이가 너무 많아 군대에 갈 수 없었던 그는, 런던에서 감시탑에 올라가 폭격으로 불이 난 지점을 확인하는 역할을 맡게 됩니다.

저는 가끔 그 감시탑에 올라간 Eliot의 심정을 상상해 봅니다. 젊은날, 서양 문명의 영적, 지적 황폐함을 간파하고 'The Waste Land'를 썼던 그였고, 유럽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조국을 버리고 유럽 시민이 된 그였는데, 이제 그의 눈 앞에서 그가 지극히 사랑하는 유럽이 전쟁에 의해 진짜 황무지로 변해버릴 위기에 처해있는 것입니다.

경보 사이렌이 울리고, 불이 꺼집니다. 하늘을 나는 비행기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이더니 런던 곳곳에 불이 솟구쳐 오릅니다. 불, 불, 곳곳에 펑펑 소리를 내며 불기둥이 솟아오릅니다. 칠흙같은 어둠속에 피어오르는 불꽃은, 그러나 이 시인의 머리속에 예상치 못한 연상작용을 일으킵니다. 헤라클레스의 몸을 태운 불로부터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연옥의 불까지, 그의 머리는 유럽 문명을 흐르고 있는 갖가지 불의 이미지를 추적해 올라갑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이 불은 파괴하는 불일 뿐 아니라, 정결케 하는 불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타오르는 이 불이 하나님이 유럽을 정화하기 위해 보내는 불로 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 시에서 '불'이 '사랑'에서 나왔다고 말합니다 ('Who then devised the torment? Love.') 그는 이 불이 우리를 불에서 건지기 위한 불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저도 우리 가정에 그런 큰 어려움이 있었던 것은, 우리 가정을 구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음을 느낍니다.

요즘, 다시 이 구절이 생각나는 것은 단지 이 시집을 발견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다시 내 삶에 많은 고난과 좌절이 느껴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고난의 가장 끝에 닥치는 고난은, 절망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 고난이 끝날 때가 다 되었다는 신호인 것입니다. 다시 한번 사랑으로 우리에게 불을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분은 우리를 불로써, 불로부터 구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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