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07.12.31 하나님께 충실함
  2. 2007.12.27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3. 2007.12.26 아가페
  4. 2007.12.25 목적과 수단
  5. 2007.12.20 사랑의 감정
  6. 2007.12.17 불의 시련
  7. 2007.12.14 아버지

하나님께 충실함

카테고리 없음 2007. 12. 31. 22:44
예수의 동생이었던 야고보는 성격이 곧고 바른말 하기를 좋아해 "의로운 야고보" (James the Just) 라는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그는 야고보서에서 점차 세속화하는 교회를 향해 이렇게 경고하였습니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 (약 4:4)

그는 이 구절에서 우리가 세상과 벗된다면 이는 하나님과 결혼관계에서 부정을 저지르는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한 것입니다.

결혼은 두 사람이 서로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기로 결정하는 행위입니다. 만약에 내가 배우자가 아닌 다른 어떤 대상을 더 사랑한다면, 이는 육체관계 여부와 상관 없이 부정이고, 결혼을 깨트리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신부로 부르신 것은 우리가 그분을 가장 사랑하도록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바쁘기에 하나님은 잊고, 우리의 생활에만 집착합니다. 직장 생활을 하고, 가정을 돌보고, 친구를 만나는 가운데, 우리는 우리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이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사실을 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의 신부로서 얼마나 그분을 사랑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마 10:37)


그분은 우리가 가족을 향한 사랑보다 그분을 더 사랑하기를 기대하시는 것이지요. 실제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자식을 제사로 바치는 시험을 통과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이 가르치고자 했던 것은 우리의 마음이 가장 사랑해야 하는 대상은 하나님이고, 다른 어떠한 대상이라도 그분의 자리를 차지한다면, 이는 곧 제거해야 하는 우상이 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자식조차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면 안될찐대, 돈이나 직업의 성공 등 다른 대상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빼앗아서는 안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2007년을 보내며, 내 마음은 얼마나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했는지 되돌아봅니다. 내가 하나님보다 세상을 사랑하지는 않았나 반성해 볼 때, 하나님 앞아서 많은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새로 시작되는 한 해는 더욱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커지기 바랍니다. 그래서 더 이상 부정을 저지르는 배우자가 아닌,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로 준비되기 원합니다.

이 블로그를 찾는 모든 분들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더욱 커지는 한해를 맞으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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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카테고리 없음 2007. 12. 27. 20:52
"하나님은 아가페시다"라고 요한은 선포했습니다 (요일 4:8). 앞서 보았듯, 아가페는 하나님의 본성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이고, 완벽한 사랑이고, 모든 것을 뛰어 넘는 사람입니다. 아가페는 세상을 위해 독생자를 보내는 사랑이고 (요 3:16),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랑이고 (요 15:13),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롬 5:8).

하나님은 아가페이시기에, 우리에게도 아가페를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agapeo, 아가페에서 파생한 동사)"는 구약의 명령이 우리에게도 가장 중요한 계명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마 22:37).

문제는 우리 마음 속에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되, 그냥 조금 사랑합니다. 정직하게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예배가운데 은혜를 받는다면 기뻐서 눈물을 흘리지만, 직장이나 가정에 어려움이 생긴다면, "하나님, 왜 나를 이처럼 괴롭히십니까?"하고 따지는 사람들입니다. 이는 아가페 사랑에서 너무나 먼 모습이지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는 바로 이러한 심정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다 주를 버릴찌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라고 자신있게 말했지만 (마 26:33), 막상 유대인들이 앞에선 겁을 먹고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한 자입니다.

베드로의 사랑이 아가페였을까요? 그는 목슴을 바쳐서 에수를 사랑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상황이 좋을 때는 누구 보다 예수님을 사랑한 듯 하지만, 상황이 바뀌면 예수님을 버리는 자였습니다.

이제 갈릴리에서 어부로 돌아간 그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십니다. 그분은 베드로가 어떤 사람인지 아셨고, 베드로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은 깨달았죠. 예수님이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아가파오) (요 21:15)

베드로는 이렇게 답합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필레오, philos에서 온 동사) 주께서 아시나이다 (요 21:15)

예수님은 아가페 사랑에 대해 물으십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자신의 과거 때문에 아가페 사랑을 표현하지 못합니다. 그는 필레오, 즉 친구의 사랑에 대해서만 말하지요. 그는 분명히 예수님을 친구로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성품에서 흘러나오는 완벽한 사랑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었지요.

다시 예수님은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아가파오) (요 21:16)

베드로는 다시 답합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필레오) 주께서 아시나이다 (요 21:16)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필레오) (요 21:17)

성경에 따르면 베드로는 예수님이 세번째에는 "사랑하느냐" (필레오)고 물으셔서 마음이 아팠다고 합니다. 그는 답합니다.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필레오)주께서 아시나이다 (요 21:17)

결국, 예수님은 베드로의 수준으로 내려오시고, 그에게 다른 어떠한 주문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가페를 표현할 준비가 되지 않은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너는 왜 아가페가 없느냐? 왜 필로스밖에 없느냐?"고 꾸짖지 않으시고, "네가 필로스 밖에 없다면, 그것을 내게 다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기준은 높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그러한 기준을 따라가기 힘들다고 느끼지요.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가 지금 있는 수준에서 우리를 만나십니다.

우리가 살 소망이 있는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무한히 넓은 마음 때문입니다. 바로 아가페의 마음이지요. 그분의 사랑을 생각할 때에, 내가 아무리 약하고 악한 자라도 그분께 나아갈 담대함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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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페

카테고리 없음 2007. 12. 26. 17:28
히브리어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스라엘 민족이 대대로 쓰던 언어입니다. 따라서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언어 자체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에 적합하도록 발달하였지요. 예를 들어, 헤세드라는 단어는 단지 인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자들에 대해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함 없이 보이시는 특별한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레미아가 멸망해가는 유다왕국을 향하여 "여호와의 헤세드가 무궁하다"고 선포하였을 때, 유다백성은 상황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소망을 찾을 수 있었죠 (애 3:22).

그에 비해 헬라어는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그리스 사람들의 언어이고, 따라서 신약성경 저자들은 하나님과 상관 없이 발달한 헬라어라는 새로운 언어로 하나님의 뜻을 전해야 하는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특히 신약 성경의 주제인 "사랑"이라는 말은 헬라어로는 표현하기가 극히 힘들었죠.

헬라어에 사랑을 뜻하는 단어가 몆가지 있기는 하지만, 어느 단어도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에로스는 열정적인 사랑이면서 동시에 육체적인 사랑입니다. 이러한 사랑은 때로 극단적으로 이기적일 수 있지요. 스토르게는 가족적이며 따뜻한 사랑이지만, 강렬한 느낌이 떨어집니다. 필리아는 친구간의 애정, 사랑인데, 절대적인 사랑에는 못미칩니다.

따라서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70인역의 전통을 따라 agape라는 단어를 받아들입니다. 신약이 말하는 아가페는 하나님의 본성에서 나오는 절대적인 사랑이지요.

아가페의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가페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아가페하자 아가페는 하나님께 속한것이니 아가페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아가페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아가페이심이라 (요일 4:7-8)


하나님은 아가페이시기에 그분의 행동도 아가페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아가페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아가페로 초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아가페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아가페하였으니 나의 아가페 안에 거하라 (요 15:9)

이처럼 하나님의 아가페를 받은 사람은 아가페를 실천하면서 삽니다. 아가페를 실천하는 삶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삶입니다.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아가페가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요일 2:5)

하나님의 아가페를 마음에 품은 사람은 아가페의 성품을 보입니다. 바울은 아가페의 성품을 이렇게 말합니다.
아가페는 오래 참고 아가페는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아가페는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 13:4-7)


우리는 삶의 모든 행동을 아가페에 근거하여야 합니다.
너희 모든 일을 아가페로 행하라 (고전 16:14)
이 모든 것 위에 아가페를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골 3:14)

이웃을 대할 때도 아가페를 따라야죠.
아가페는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아가페는 율법의 완성이니라 (롬 13:10)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아가페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벧전 4:8)
특히 그리스도인은 서로에게 아가페를 보여야 합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아가페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아가페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요 15:12)

만약 우리가 세상을 아가페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아가페를 떠난 것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아가페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아가페하면 아버지의 아가페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요일 2:15)

하나님은 아가페를 떠난 사람을 꾸짖으십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아가페를 버렸느니라 (계 2:4)

아가페는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하나님이 없이 이웃에게 아가페를 나누려는 시도는 늘 실패할 수 밖에 없지요. 하지만 우리는 아가페의 부족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속에 아가페를 부어 주시기 때문이죠.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가페가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롬 5:5)

결국, 중요한 것은 아가페이신 하나님을 늘 만나고, 늘 그분의 아가페에 거하고, 늘 아가페를 바탕으로 사는 것이겠죠. 이것이 바로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삶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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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과 수단

카테고리 없음 2007. 12. 25. 16:12
제가 군대에 있을 때, 훈화 시간에 어느 장교가 군에 있을 동안은 종교활동도 열심히 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종교활동을 열심히 한 군사는 전투력도 좋다"는 말을 하더군요. 살생을 금지하는 불교나 인류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는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사람 죽이는 능력이 더 뛰어나다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찌 당황했던 기억이 나는군요.

꼭 그 장교 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종교를 어떠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듯 합니다. 예를 들어 자신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 부모도 아이들은 "착한 사람이 되라고" 교회에 보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해외에서 한인교회는 단지 교회일 뿐이 아니라 교제, 사업, 쇼핑 등을 한 번에 해결하는 한인사회의 핵심이죠. 또 자녀의 입시가 다가오면 자녀를 원하는 대학에 합격시키기 위해 안 다니던 교회나 절로 나오는 분도 많을 것입니다.

저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의 유익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때가 많음을 느낍니다. 예를 들어, 무언가 어려운 일이 벌어지면, 기도도 열심히 하고, 하나님이 실어하실 만한 일은 삼가다가, 중요한 고비가 넘어가 마음에 여유가 생기면, 기도도 등안시 하고, 삶의 태도도 느슨해 지는 제 자신을 보게 됩니다. 부끄러운 일이지요.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사랑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떠한 대상을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사랑한다면, 그에게는 다른 목적이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내가 하나님을 이렇게 사랑하니, 재정적 어려움은 없어지겠지. 내 자식은 좋은 대학 들어가겠지" 하는 생각을 할 여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목적이고, 다른 모든 것은 수단일 뿐이지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태도는 그러한 태도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셨을 때, 그분은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셨습니다. 자기 아들의 목숨을 버리기까지 사랑하셨으니, 그분에게 인간은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였죠. 진정한 사랑이란 늘 사랑의 대상을 최고의 목적으로 놓기 마련입니다. 만약 이 사랑을 통해 무엇을 얻고자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겠죠.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그 아들을 보내심을 기념하는 크리스마스를 맞아, 나는 하나님을 얼마나 내 인생의 목적으로 놓고 있는지 반성해 봅니다. 하나님이 날 무조건 사랑하시듯, 나도 하나님을 무조건 사랑하기 원합니다. 내 삶의 모든 순간은 그분을 향한 사랑의 수단이길 원합니다. 주께서 내 마음을 깨끗케 하사, 세상을 향한 사랑을 모두 제거하시길 기도합니다. 그래서, 내 마음이 그분이 기쁘게 거하실 거처로 마련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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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감정

카테고리 없음 2007. 12. 20. 19:14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보낸 첫번째 편지를 매우 과격한 말로 마무리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고전 16:22)


여기서 "저주를 받을찌어다"로 번역된 말은 단지 "벌을 받을찌어다" 또는 "안 좋은 일을 당할찌어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부터 버려저서 구원의 소망이 없이 지옥에 던져지리라는 뜻입니다. 즉,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구원되지 못한다는 말이지요. 이는 "예수를 믿기만 하면 천국에 간다"는 말이 성경의 가르침과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예수를 믿을 뿐 아니라 예수를 사랑하는 자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고, 진정으로 천국에 갈 수 있는 자이지요.

바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특권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바 되었느니라 (고전 8:3)
이 구절을 쉽게 번역하자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도 그를 아신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그를 모르시겠죠. 예수님은 마지막 심판 날에 자신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 내며, 많은 권능을 행한 사람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며 쫓아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쫓아내신 이유는 그들을 알지 못하시기 때문이고, 예수님이 그들을 알지 못하신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을 사랑해야 할까요? 우리는 교회에서 늘 "사랑은 감정이 아니다, 결단이다"는 말을 듣습니다. 하지만 저는 "사랑은 감정이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여기 서로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넘치는 부부가 있고, 서로에 대한 사랑의 감정은 없지만 사랑하기로 결단한 부부가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어느 쪽이 더 올바른 부부의 모습일까요? 여기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넘치는 그리스도인이 있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은 없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기로 결정한 그리스도인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어느쪽이 더 하나님을 사랑하는 올바른 모습일까요? 사랑하기로 결정한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보다 더 낮은 수준일 수 밖에 없습니다.

현대인이 "사랑"을 하지 않고 "사랑하기로 결정"만 하는 까닭은 현대인의 감정상태가 정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은 거대한 두뇌, 과발육한 욕정, 그리고 매마른 감정을 가진 존재입니다. 따라서 현대인이 가장 믿지 못하는 것이 바로 감정입니다. 현대인에게 감정은 우울, 혼동, 불안정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죠.

하지만 사랑이 사랑이기 위해선 감정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랑의 감정을 우리에게 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갈 4:6)

이 구절은 그리스도인의 신분 (하나님의 아들)으로 부터 시작해서, 이러한 신분에 맞는 감정 (아들의 영), 그리고 이러한 감정에서 흘러나오는 행동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름)까지 보여줍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이 신분에 맞는 감정이 들지 않음으로 감정을 결단이라는 의지로 대체하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감정이 없이 결단에 의존한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고, 따라서 이러한 사랑을 추구하는 사람은 쉽게 지쳐버릴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속에 사랑의 감정을 부어주시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감정을 억누르고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진정으로 우리와 사랑의 감정을 나누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고 성령이 주시는 감정에 자신을 맏길 때, 우리는 하나님과 새로운 수준의 친밀감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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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시련

카테고리 없음 2007. 12. 17. 12:03
What we call the beginning is often the end
And to make an end is to make a beginning.

-T.S. Eliot, Four Quartets


얼마전 시내에 있는 서점을 갔다가 영서 코너에서 반가운 책을 한권 발견했습니다. T.S. Eliot의 Four Quartets라는 시를 담은 시집인데, 이 시집 말고도 엘리엇의 시집 몇권이 더 보였습니다. 저는 원래 시집이나 시인에 대해 관심이 없는데, T.S. Eliot의 시 만큼은 제 마음에 와닿더군요. 물론 이 글을 읽는 분 대부분이, 'T.S. Eliot이 누군데?' 하시겠지만, 이 사람이 '사월은 잔인한 달...' 하는 구절을 썼다면 모두, '아하!' 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Four Quartets에 대해선 특별한 사연이 있습니다. 97년, 프랑스에서 1년간의 간사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입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사역했고, 열매도 많았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돌아왔지만, 한국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 건 1년 전 떠날 때 보다 더욱 어려워진 가정 형편과, 그로 인해 고생하시는 부모님, 그리고 그러한 현실이 싫어서 집 밖으로 맴돌며 집에 들어와서는 사사건건 부모님과 마찰을 빚는 내 자신의 모습뿐이었습니다. 어느 날은 쌓였던 울분이 폭발하면서 부모님앞에서 악을 쓰며 싸웠던 기억도 있습니다. 아마 내 인생에서 가장 낮은 지점이었을 것입니다...

끝이 없는 것 같은 가난, 끝이 없을 것 같은 가정 불화... 하루 하루의 삶이 고통이었고, 어디서도 소망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과연 왜 내 삶에 이런 고통이 일어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죠. 그리고 먼 옛날부터 계속되어온 이러한 고통이 앞으로 얼마나 계속될지를 알 수 없기에 고통을 이겨낼 자신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Eliot의 Four Quartets에 나오는 이 싯구가 기억이 나더군요.

To be redeemed from fire by fire...


불로부터 불에 의해 구원된다... 그때 제 마음속에 '지금 내가 당하는 고통은, 나를 고통으로부터 구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다'는 계시가 임했습니다. 즉, 하나님이 내게 이런 고통을 주시는 것은, 역설적으로, 내가 더 이상 고통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는 뜻입니다.

이 구절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그가 이 시를 쓰게 된 배경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미국인이었지만, 유럽의 문화를 너무 사랑해서 결국 영국에 귀화합니다. 그는 또한 하나님을 믿기로 결정하고 영국 국교회 교인이 됩니다. 그런데 그가 영국에 살고 있을 때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합니다. 나이가 너무 많아 군대에 갈 수 없었던 그는, 런던에서 감시탑에 올라가 폭격으로 불이 난 지점을 확인하는 역할을 맡게 됩니다.

저는 가끔 그 감시탑에 올라간 Eliot의 심정을 상상해 봅니다. 젊은날, 서양 문명의 영적, 지적 황폐함을 간파하고 'The Waste Land'를 썼던 그였고, 유럽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조국을 버리고 유럽 시민이 된 그였는데, 이제 그의 눈 앞에서 그가 지극히 사랑하는 유럽이 전쟁에 의해 진짜 황무지로 변해버릴 위기에 처해있는 것입니다.

경보 사이렌이 울리고, 불이 꺼집니다. 하늘을 나는 비행기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이더니 런던 곳곳에 불이 솟구쳐 오릅니다. 불, 불, 곳곳에 펑펑 소리를 내며 불기둥이 솟아오릅니다. 칠흙같은 어둠속에 피어오르는 불꽃은, 그러나 이 시인의 머리속에 예상치 못한 연상작용을 일으킵니다. 헤라클레스의 몸을 태운 불로부터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연옥의 불까지, 그의 머리는 유럽 문명을 흐르고 있는 갖가지 불의 이미지를 추적해 올라갑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이 불은 파괴하는 불일 뿐 아니라, 정결케 하는 불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타오르는 이 불이 하나님이 유럽을 정화하기 위해 보내는 불로 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 시에서 '불'이 '사랑'에서 나왔다고 말합니다 ('Who then devised the torment? Love.') 그는 이 불이 우리를 불에서 건지기 위한 불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저도 우리 가정에 그런 큰 어려움이 있었던 것은, 우리 가정을 구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음을 느낍니다.

요즘, 다시 이 구절이 생각나는 것은 단지 이 시집을 발견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다시 내 삶에 많은 고난과 좌절이 느껴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고난의 가장 끝에 닥치는 고난은, 절망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 고난이 끝날 때가 다 되었다는 신호인 것입니다. 다시 한번 사랑으로 우리에게 불을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분은 우리를 불로써, 불로부터 구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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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카테고리 없음 2007. 12. 14. 22:11
요즘 히틀러의 전기를 읽다가 발견한 흥미로운 사실은, 히틀러의 아버지(알로이스 히틀러)의 취미가 꿀벌 기르기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있어서 꿀벌 기르기는 취미의 수준을 넘어서 집착으로 발전하고, 나중에는 꿀벌을 기르는데 헌신하려고 직업을 그만두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가 왜 꿀벌 기르기에 집착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제가 보기에 그는 자신의 혼잡한 내면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려고 매우 규칙적이고 질서 있게 생활을 하는 꿀벌에 매달릴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생각을 합니다. 실제로 그는 사생아로 태어났고, 그가 태어난 다음 어머니가 결혼했는데, 이 양아버지마저 얼마 후 사망하고, 결국은 양아버지의 동생이 그를 입양해서 키우게 됩니다. 사생아로서 부끄러움을 안고 태어난 후, 결국 안정된 가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자라난 그는 나중에는 여러 여자와 관계를 맺는 등 매우 비도덕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그의 마지막 부인이 아돌프 히틀러의 어머니였는데, 매우 약하고 순종적인 여자였죠.

어릴때 부터 성격이 거센 아돌프는 계속 아버지와 충돌하게 되고, 나중에는 매우 이기적이고 고집불통이며 현실감각이 없는 젊은이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런데 가만히 그의 삶을 살펴보면, 그가 자신의 인생에 관여하려는 아버지에 대해 거세게 저항하며, 심지어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 슬퍼하지도 않았다고 하지만, 그가 정치지도자로서 보여준 모습은 꿀벌을 치던 그의 아버지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입니다. 즉, 아버지가 꿀벌들의 질서 정연한 모습을 보고 즐겼듯, 그도 독일인들을 마치 꿀벌처럼 다루면서, 그들이 극도로 질서 있는 모습으로 살아가도록 사회 제도를 개혁합니다. 히틀러 치하의 독일의 모습을 보며 '마치 생각 없는 꿀벌들의 질서 정연한 모습과 같다'고 묘사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요? 히틀러는 아들이 아버지와 건전한 관계를 맺지 못할 때 아버지의 모습을 더욱 닮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예라고 생각합니다.

히틀러가 지극히 존경했고, 그의 나치 철학의 바탕을 제공해 준 철학자 니체도 아버지와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한 예입니다. 니체의 아버지는 목사였습니다. 그런데 목사의 아들인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합니다. 과연 니체가 아버지의 모습에서 살아있는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하고도 '신은 죽었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요? 니체의 아버지가 얼마나 성공적인 사역자였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좋은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였기에 그의 아들은 고통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었고, 이 아들의 철학은 히틀러를 통해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게 됩니다.

저는 요즘 John Owen이 쓴 'On Communion with God'(하나님과의 교제)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우리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과 각각 교제를 할 필요를 설명합니다. 먼저 그는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분인가를 설명합니다. 그는 성경을 통해 성부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죠.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 줄 믿은 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요 16:26,27)

다시 말하면, '내가 너희를 위해 아버지께 간구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는 뜻입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분노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아버지의 분노를 누그러뜨리려 노력한다는 개념과는 정반대의 설명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지 않으셔도, 이미 아버지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심리학자 칼 융은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에게 분노하는 분이다'는 개념을 퍼트린 사람입니다. 그는 니체와 마찬가지로 목사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기쁨과 승리가 없는 그의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기독교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그래서 그가 찾게 된 것이 바로 영지주의입니다. 영지주의는 기독교와 이방종교의 혼합으로,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왔다는 것을 부정하고(요일 4:2-3은 이들의 가르침에 대한 경고이지요)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지 않고 신비한 지식(gnosis)을 얻는 데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거의 천 오백 년 동안 땅속에 묻혔던 영지주의는 칼 융에 의해 부활 되었고, 대중문화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한 명의 사역자가 자신의 아들에게 건전한 크리스천의 모습을 보이지 못함으로 세상에 악이 퍼진 또 다른 예이지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은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이지요. 이러한 아버지 하나님을 알 때,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의 모습을 자녀들에게 보여줄 때,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수 천명을 대상으로 하는 사역에서 성공하더라도, 아버지 하나님의 모습이 나를 통해 내 자녀에게 전달되지 못한다면, 그 모든 사역의 성공도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부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되기를 기도합니다(롬 5:5). 그래서 그 놀라운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과 늘 교제하는 삶을 살게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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