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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7.12.14 아버지

아버지의 마음을 품은 사역자

카테고리 없음 2007. 12. 21. 21:00
제가 10년간 YWAM에서 간사 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프랑스에서 DTS 간사로 섬기던 2003년입니다. 이 때 우리 전도여행팀에 한 미국인 학생이 있었는데, 그는 내게 매우 거친 말과 행동으로 대했고, 나는 내가 저지르지 않은 잘못에 대해 벌 받는 것 같아 매우 감정이 상했죠.

그가 나를 그렇게 미워한 이유는 내가 그의 아버지를 연상케 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감정적으로 매마른 목사님이었는데, 나이가 아주 많았을 때, 그를 낳았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중년이 되어 낳은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찌 몰라 거리감을 두었고, 그는 버려졌다는 상처를 안고 자랐죠. 그리고 DTS에 와서 권위자인 나를 보니까 아버지에 대한 미움의 감정이 몰려와 나를 미워할 수 밖에 없었지요.

저는 그 학생을 놓고 많은 고민을 해야 했습니다. 따끔하게 꾸짖으면 정신을 차릴까. 나를 괴롭히지 말라고 마음을 터 놓고 부탁을 해볼까. 아니면 그런 사람이 없는 듯 무시해 버릴까... 그런데 하나님이 제게 "저 아이가 왜 네게 그렇게 행동하는지 아느냐?"라고 물으시더군요. 하나님은 "저 아이는 아버지로 부터 사랑을 못 받아 마음이 상하였고, 너라는 권위자를 만나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경험하고 싶은 마음에 저렇게 행동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그는 내가 무조건 밉겠지만, 사실 그의 마음속은 아버지의 사랑을 향한 갈망이 너무도 크기에 뒤틀려진 행동을 하는 것이었죠.

그때 저는 사역에 있어서 사랑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올바르게 자라려면 사랑을 받는 경험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자라나면서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부족하고, 그러한 사랑의 결핍은 누군가 그 사람을 사랑하기 전 까지는 인생의 가장 커다란 문제로 남기 마련입니다. 그러한 사람을 사랑해 주는 것이 바로 사역자의 역할이겠지요 특히 요즘처럼 부모의 사랑을 모르고 자란 세대에게는 더욱 부모의 역할을 해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저의 인간관계의 기본은 'give and take'였던 것 같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 내게 잘 해주는 사람에겐 나도 잘해주고, 내 마음에 안드는 사람, 내게 상처주는 사람은 무시하고 멀리 했죠. 예전에는 그게 옳은 태도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특히 사역자가 사역의 대상자에게 사랑을 베풀 용의가 없다면, 이는 온전한 사역자의 태도가 아닐 것입니다. 마치 부모가 오래 참음으로 자식이 성년에 이르도록 도와주듯, 사역자라면 아비의 마음을 가져야 사역의 대상이 자라날 수 있겠죠.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스승은 많지만 아비는 여럿이 아니다. 너희 아비는 바로 나다'라고 말했습니다 (고전 4:15). 많은 교회를 세운 바울은 결국 그 교회들에 의해 다 버림 받고, 늘 외로움과 거절감과 싸워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늘 '아비의 마음'을 잃지 않았고, 그렇기에 자신있게 '나는 너희의 아버지다'고 말할 수 있었죠. 제가 계산적인 태도로 학생들을 대한다면, 제 감정은 보호가 되고, 사역도 효과적으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버지의 마음은 배울 수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점에서 프랑스 DTS에서 겪은 힘든 경험은 하나님이 제게 아버지의 마음을 가르치시고자 특별히 준비한 귀중한 기회였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30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더욱 성숙한 마음을 품기 원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으로 사역의 대상을 포용하고, 감싸주고, 그들이 성숙하도록 인내로 도와주는 자가 되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가능토록 은혜를 주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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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카테고리 없음 2007. 12. 14. 22:11
요즘 히틀러의 전기를 읽다가 발견한 흥미로운 사실은, 히틀러의 아버지(알로이스 히틀러)의 취미가 꿀벌 기르기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있어서 꿀벌 기르기는 취미의 수준을 넘어서 집착으로 발전하고, 나중에는 꿀벌을 기르는데 헌신하려고 직업을 그만두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가 왜 꿀벌 기르기에 집착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제가 보기에 그는 자신의 혼잡한 내면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려고 매우 규칙적이고 질서 있게 생활을 하는 꿀벌에 매달릴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생각을 합니다. 실제로 그는 사생아로 태어났고, 그가 태어난 다음 어머니가 결혼했는데, 이 양아버지마저 얼마 후 사망하고, 결국은 양아버지의 동생이 그를 입양해서 키우게 됩니다. 사생아로서 부끄러움을 안고 태어난 후, 결국 안정된 가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자라난 그는 나중에는 여러 여자와 관계를 맺는 등 매우 비도덕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그의 마지막 부인이 아돌프 히틀러의 어머니였는데, 매우 약하고 순종적인 여자였죠.

어릴때 부터 성격이 거센 아돌프는 계속 아버지와 충돌하게 되고, 나중에는 매우 이기적이고 고집불통이며 현실감각이 없는 젊은이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런데 가만히 그의 삶을 살펴보면, 그가 자신의 인생에 관여하려는 아버지에 대해 거세게 저항하며, 심지어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 슬퍼하지도 않았다고 하지만, 그가 정치지도자로서 보여준 모습은 꿀벌을 치던 그의 아버지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입니다. 즉, 아버지가 꿀벌들의 질서 정연한 모습을 보고 즐겼듯, 그도 독일인들을 마치 꿀벌처럼 다루면서, 그들이 극도로 질서 있는 모습으로 살아가도록 사회 제도를 개혁합니다. 히틀러 치하의 독일의 모습을 보며 '마치 생각 없는 꿀벌들의 질서 정연한 모습과 같다'고 묘사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요? 히틀러는 아들이 아버지와 건전한 관계를 맺지 못할 때 아버지의 모습을 더욱 닮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예라고 생각합니다.

히틀러가 지극히 존경했고, 그의 나치 철학의 바탕을 제공해 준 철학자 니체도 아버지와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한 예입니다. 니체의 아버지는 목사였습니다. 그런데 목사의 아들인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합니다. 과연 니체가 아버지의 모습에서 살아있는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하고도 '신은 죽었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요? 니체의 아버지가 얼마나 성공적인 사역자였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좋은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였기에 그의 아들은 고통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었고, 이 아들의 철학은 히틀러를 통해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게 됩니다.

저는 요즘 John Owen이 쓴 'On Communion with God'(하나님과의 교제)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우리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과 각각 교제를 할 필요를 설명합니다. 먼저 그는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분인가를 설명합니다. 그는 성경을 통해 성부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죠.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 줄 믿은 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요 16:26,27)

다시 말하면, '내가 너희를 위해 아버지께 간구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는 뜻입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분노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아버지의 분노를 누그러뜨리려 노력한다는 개념과는 정반대의 설명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지 않으셔도, 이미 아버지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심리학자 칼 융은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에게 분노하는 분이다'는 개념을 퍼트린 사람입니다. 그는 니체와 마찬가지로 목사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기쁨과 승리가 없는 그의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기독교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그래서 그가 찾게 된 것이 바로 영지주의입니다. 영지주의는 기독교와 이방종교의 혼합으로,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왔다는 것을 부정하고(요일 4:2-3은 이들의 가르침에 대한 경고이지요)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지 않고 신비한 지식(gnosis)을 얻는 데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거의 천 오백 년 동안 땅속에 묻혔던 영지주의는 칼 융에 의해 부활 되었고, 대중문화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한 명의 사역자가 자신의 아들에게 건전한 크리스천의 모습을 보이지 못함으로 세상에 악이 퍼진 또 다른 예이지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은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이지요. 이러한 아버지 하나님을 알 때,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의 모습을 자녀들에게 보여줄 때,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수 천명을 대상으로 하는 사역에서 성공하더라도, 아버지 하나님의 모습이 나를 통해 내 자녀에게 전달되지 못한다면, 그 모든 사역의 성공도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부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되기를 기도합니다(롬 5:5). 그래서 그 놀라운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과 늘 교제하는 삶을 살게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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