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임재'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7.12.29 세상으로 흐르는 강 II
  2. 2007.12.28 세상으로 흐르는 강
  3. 2007.12.16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

세상으로 흐르는 강 II

카테고리 없음 2007. 12. 29. 16:55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우리 속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갑니다. 이 생수의 강을 세상에 전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이지요.

그렇다면 "세상에 생수의 강을 흘러보낸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저는 하나님의 임재의 향기를 발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싶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머물 때, 그의 삶을 바뀝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나왔을 때, 그의 얼굴에서는 광채가 났습니다 (출 34:29). 이는 그가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였기에 그의 존재가 바뀌었기 때문이죠. 우리도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면 삶이 바뀌면서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후 2:14)

우리가 하나님을 따르는 삶을 살 때, 우리의 삶에선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가 나기 마련입니다. 세상 사람은 이러한 냄새를 맡을 때, 하나님의 존재를 알게 되는 것이지요.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풍기지 않는다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전통적인 표현을 쓴다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상서로운 기운을 풍기는" 존재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가는 곳에는 싸움이 멈추고 화해가 일어나고, 미움이 사랑으로 바뀌고, 혼동이 멈추고 질서가 회복되어야 정상입니다. 마치 매마른 땅에 비가 내리듯, 광야에 생수가 흘러가듯, 그리스도인이 없던 곳에 그리스도인이 가면 변화가 일어나야 정상이지요.

이러한 외적인 변화는 그리스도인의 마음 속에 생명의 주 (행 3:15)가 거하시고 활발하게 활동하실 때만 가능합니다. 즉, 하나님과 깊은 교제로 인해 내면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가득할 때, 그 생명은 밖으로 흘러나가 세상을 바꾸는 것이지요.

많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살며 세상에 물들 것을 걱정하지만, 우리의 목표는 세상에 물들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세상에 하나님의 강을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임재 가운데 거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임재를 자신이 가는 모든 곳에 전할 것입니다.

오늘도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대표자로 살아가는 모든 분들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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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으로 흐르는 강

카테고리 없음 2007. 12. 28. 14:54
성경은 하나님의 임재에서 흘러나오는 강에 대해 네 번 언급합니다.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창 2:10)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장막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시 46:4)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 내리더라 (겔 47:1)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계 22:1)

즉, 성경은 하나님의 강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의 강으로 끝납니다. 그렇다면 이 강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강은 생명의 근원인 물의 흐름입니다. 대부분의 생명체는 수분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고, 특히 커다란 생명체는 더욱 물을 의존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생명의 근원인 물은 바로 영적인 생명의 근원인 성령의 상징으로 볼 수 있죠 (막 1:8, 요 3:5, 행 1:5).

하지만 물이 머물러 있으면 강일 수 없습니다. 물이 밖으로 흘러 나가야 강이지요. 성경이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흘러나가는 강을 보이는 이유는, 하나님의 임재가 한 곳에 머무를 수 없고, 계속 바깥으로 흘러가야 한다는 사실을 뜻합니다.

우리는 신앙이란 개인의 문제이기에, 결국 마음의 영역에서 끝난다고 봅니다. 하지만 이는 성경의 가르침과 전혀 다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임재는 마음에 머물지 않고, 강이 되어 세상으로 흘러나간다고 말하였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흘러나온 네 강은 실체였습니다. 계시록에 나온 보좌로부터 흘러나온 강도 미래에 실체로 드러나겠죠. 하지만 시편과 에스겔서의 강은 실체가 아닌, 환상입니다 (예루살렘에는 강이 없습니다). 즉, 역사는 강에서 시작해 강으로 끝나는데, 역사의 중간에는 강이 없는 셈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역사를 흐르는 강이 실제로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요 7:38)

그렇습니다. 역사를 흐르는 강은 바로 우리 믿는 자의 삶에서 흘러나옵니다. 우리에게서 흘러나오는 강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에서 나오는 강이고, 이 강은 세상으로 흘러나가 세상에 생명을 주는 강입니다.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는 지극히 힘듭니다. 세상에서 신앙을 유지하고 살기도 힘든데, 세상에 생명을 주며 살기는 더욱 힘들죠. 하지만 세상에 생수를 흘러보내는 강의 역할은 우리에게 피할 수 없는 임무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이죠.

내일은 세상에 생수를 흘러보내는 일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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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

카테고리 없음 2007. 12. 16. 23:3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히 10:19-22)



히브리서는 예수를 믿는 유대인 신자를 대상으로 쓴 편지입니다. 이들은 다른 유대인들로부터는 조상들의 종교를 버렸다는 이유로 핍박을 받았고, 로마 정부로 부터는 사회를 혼란케 하는 새로운 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았죠 (히 10:32-34).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환란을 매우 쉽게 피할 수도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 정부는 유대교를 특수 종교로 인정하였기에 유대교인에게 신앙의 자유를 보장해 주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이 '예수'를 강조하지 않고, "우리는 단지 조금 변형한 유대교를 믿는다"고 주장하면 유대인과 로마 정부로부터 핍박을 받을 필요가 없었죠. 따라서 이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핍박을 받을 때 마다 기독교를 유대교화하고 싶은 유혹을 느꼈을 것이니다.

실제로 많은 유대인 신자들은 점차 '그리스도인'이라기보다는 '유대교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나을 정도로 유대교의 풍습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 히브리서입니다. 이 서신에서 저자는 모세의 율법과 구약의 제사제도가 인간을 하나님께 이끌지 못하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이라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우리는 아무리 핍박을 받는다 하더라도 유대교로 돌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율법을 따르는 자는 곧 모세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입니다. 그에 비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들인 자입니다. 요한은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의 차이점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요 1:17)


처음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율법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초신자는 '하나님을 믿는 삶'을 '담배 안 피는 삶', '술 안 마시는 삶', '교회 봉사하는 삶' 등 인간의 행동 위주로 생각합니다. 이러한 생각이 지배하게 되면 결국 율법주의가 생겨나기 마련이죠.

율법주의란 율법을 중심으로 하는 삶을 뜻합니다. 율법은 '너는 해야한다(you should)'는 원리를 따릅니다. '너는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아야 한다.' '너는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 '너는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 '너는 남의 것을 탐하면 안된다.' 이러한 계명은 모두 우리의 의무를 가르치는 율법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우리가 이런 율법을 다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죠. 그러면 우리는 더더욱 열심히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그럴수록 자신이 얼마나 율법을 지킬 능력이 없음을 깨닫고 좌절합니다.

우리는 처음에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고 하나님께 나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부터 믿음이 아닌 율법에 의존해서 하나님께 나아오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는 삶은 결코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역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 (요 5:45)


오늘날의 율법을 의존해 사는 그리스도인은 옛 유대인들 처럼 모세를 '바라'며, 또는 '신뢰'하며 살아갑니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삶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열어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는 그러한 방법이 실패하면 그들은 '예수' 때문에 자신들이 어려움을 겪는다고 생각하죠.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셨듯, 그들은 예수를 비난할 것이 아니라 모세를 바라는 태도, 즉 율법적인 태도를 회개해야 합니다.

모세의 율법을 의존하는 사람은 자신의 의로움을 인정하는 것이고, 이는 실망과 좌절을 낳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율법을 지킴으로 나아오길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신 이유는 우리가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엔 거대한 간격이 존재합니다. 이쪽 절벽에서 저쪽 절벽으로 뛰어 건널 수 없듯, 인간은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이 계신 영역에 건너갈 수 업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 4:14-16)


라틴어로 제사장은 pontifex이고, 이는 '다리'(pons)와 '만들다'(facio)의 합성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다리를 만드는 분이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다리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제사장 제도는 하늘 위에 있는 참된 제사장의 직무에 대한 표현일 뿐, 삶을 바꾸는 능력은 없습니다 (히 8:5, 10:1, 4). 따라서 율법을 아무리 열심히 지켜도 인간의 마음을 괴롭히는 양심의 가책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히 9:9-10)

그러나 예수그리스도의 참된 제사는 양심을 깨끗케 합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히 9:14)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 양심에 뿌려질 때, 우리 양심은 더 이상 과거에 지은 죄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고, 이렇게 마음에 평안을 얻어야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되는 법이죠.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해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담대하게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히 11:19, 20 )

우리가 자신을 바라본다면 결코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합니다. 시편기자가 말했듯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시 130:3).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기 원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 12:2)


예수는 믿음의 주(원어의 의미로는 '시작하는 이')요 온전케 하시는 이('완성하는 이')이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믿음을 갖게 인도하신 분이고, 또한 언젠가 우리 믿음이 완성되도록 지금도 우리를 이끄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눈을 그분께 맞추고 그분이 어떠한 일을 하셨는지, 그분이 누구신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분을 바라보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의 임재 가운데로 초청하십니다 (히 10:22, 4:16). 우리는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는 없습니다. 오직 '예수를 바라보는' 자만이 하나님의 임재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담대히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시선을 우리 자신으로부터 돌려 예수께 고정시킨다면 우리는 참으로 자유롭게 되고, 하나님의 임재가운데서 그분과 교제하는 즐거움을 누릴 것입니다.

예수를 바라보며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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