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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12.27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2. 2007.12.16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카테고리 없음 2007. 12. 27. 20:52
"하나님은 아가페시다"라고 요한은 선포했습니다 (요일 4:8). 앞서 보았듯, 아가페는 하나님의 본성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이고, 완벽한 사랑이고, 모든 것을 뛰어 넘는 사람입니다. 아가페는 세상을 위해 독생자를 보내는 사랑이고 (요 3:16),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랑이고 (요 15:13),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롬 5:8).

하나님은 아가페이시기에, 우리에게도 아가페를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agapeo, 아가페에서 파생한 동사)"는 구약의 명령이 우리에게도 가장 중요한 계명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마 22:37).

문제는 우리 마음 속에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되, 그냥 조금 사랑합니다. 정직하게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예배가운데 은혜를 받는다면 기뻐서 눈물을 흘리지만, 직장이나 가정에 어려움이 생긴다면, "하나님, 왜 나를 이처럼 괴롭히십니까?"하고 따지는 사람들입니다. 이는 아가페 사랑에서 너무나 먼 모습이지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는 바로 이러한 심정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다 주를 버릴찌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라고 자신있게 말했지만 (마 26:33), 막상 유대인들이 앞에선 겁을 먹고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한 자입니다.

베드로의 사랑이 아가페였을까요? 그는 목슴을 바쳐서 에수를 사랑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상황이 좋을 때는 누구 보다 예수님을 사랑한 듯 하지만, 상황이 바뀌면 예수님을 버리는 자였습니다.

이제 갈릴리에서 어부로 돌아간 그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십니다. 그분은 베드로가 어떤 사람인지 아셨고, 베드로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은 깨달았죠. 예수님이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아가파오) (요 21:15)

베드로는 이렇게 답합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필레오, philos에서 온 동사) 주께서 아시나이다 (요 21:15)

예수님은 아가페 사랑에 대해 물으십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자신의 과거 때문에 아가페 사랑을 표현하지 못합니다. 그는 필레오, 즉 친구의 사랑에 대해서만 말하지요. 그는 분명히 예수님을 친구로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성품에서 흘러나오는 완벽한 사랑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었지요.

다시 예수님은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아가파오) (요 21:16)

베드로는 다시 답합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필레오) 주께서 아시나이다 (요 21:16)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필레오) (요 21:17)

성경에 따르면 베드로는 예수님이 세번째에는 "사랑하느냐" (필레오)고 물으셔서 마음이 아팠다고 합니다. 그는 답합니다.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필레오)주께서 아시나이다 (요 21:17)

결국, 예수님은 베드로의 수준으로 내려오시고, 그에게 다른 어떠한 주문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가페를 표현할 준비가 되지 않은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너는 왜 아가페가 없느냐? 왜 필로스밖에 없느냐?"고 꾸짖지 않으시고, "네가 필로스 밖에 없다면, 그것을 내게 다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기준은 높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그러한 기준을 따라가기 힘들다고 느끼지요.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가 지금 있는 수준에서 우리를 만나십니다.

우리가 살 소망이 있는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무한히 넓은 마음 때문입니다. 바로 아가페의 마음이지요. 그분의 사랑을 생각할 때에, 내가 아무리 약하고 악한 자라도 그분께 나아갈 담대함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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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

카테고리 없음 2007. 12. 16. 23:3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히 10:19-22)



히브리서는 예수를 믿는 유대인 신자를 대상으로 쓴 편지입니다. 이들은 다른 유대인들로부터는 조상들의 종교를 버렸다는 이유로 핍박을 받았고, 로마 정부로 부터는 사회를 혼란케 하는 새로운 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았죠 (히 10:32-34).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환란을 매우 쉽게 피할 수도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 정부는 유대교를 특수 종교로 인정하였기에 유대교인에게 신앙의 자유를 보장해 주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이 '예수'를 강조하지 않고, "우리는 단지 조금 변형한 유대교를 믿는다"고 주장하면 유대인과 로마 정부로부터 핍박을 받을 필요가 없었죠. 따라서 이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핍박을 받을 때 마다 기독교를 유대교화하고 싶은 유혹을 느꼈을 것이니다.

실제로 많은 유대인 신자들은 점차 '그리스도인'이라기보다는 '유대교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나을 정도로 유대교의 풍습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 히브리서입니다. 이 서신에서 저자는 모세의 율법과 구약의 제사제도가 인간을 하나님께 이끌지 못하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이라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우리는 아무리 핍박을 받는다 하더라도 유대교로 돌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율법을 따르는 자는 곧 모세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입니다. 그에 비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들인 자입니다. 요한은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의 차이점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요 1:17)


처음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율법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초신자는 '하나님을 믿는 삶'을 '담배 안 피는 삶', '술 안 마시는 삶', '교회 봉사하는 삶' 등 인간의 행동 위주로 생각합니다. 이러한 생각이 지배하게 되면 결국 율법주의가 생겨나기 마련이죠.

율법주의란 율법을 중심으로 하는 삶을 뜻합니다. 율법은 '너는 해야한다(you should)'는 원리를 따릅니다. '너는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아야 한다.' '너는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 '너는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 '너는 남의 것을 탐하면 안된다.' 이러한 계명은 모두 우리의 의무를 가르치는 율법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우리가 이런 율법을 다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죠. 그러면 우리는 더더욱 열심히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그럴수록 자신이 얼마나 율법을 지킬 능력이 없음을 깨닫고 좌절합니다.

우리는 처음에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고 하나님께 나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부터 믿음이 아닌 율법에 의존해서 하나님께 나아오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는 삶은 결코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역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 (요 5:45)


오늘날의 율법을 의존해 사는 그리스도인은 옛 유대인들 처럼 모세를 '바라'며, 또는 '신뢰'하며 살아갑니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삶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열어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는 그러한 방법이 실패하면 그들은 '예수' 때문에 자신들이 어려움을 겪는다고 생각하죠.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셨듯, 그들은 예수를 비난할 것이 아니라 모세를 바라는 태도, 즉 율법적인 태도를 회개해야 합니다.

모세의 율법을 의존하는 사람은 자신의 의로움을 인정하는 것이고, 이는 실망과 좌절을 낳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율법을 지킴으로 나아오길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신 이유는 우리가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엔 거대한 간격이 존재합니다. 이쪽 절벽에서 저쪽 절벽으로 뛰어 건널 수 없듯, 인간은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이 계신 영역에 건너갈 수 업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 4:14-16)


라틴어로 제사장은 pontifex이고, 이는 '다리'(pons)와 '만들다'(facio)의 합성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다리를 만드는 분이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다리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제사장 제도는 하늘 위에 있는 참된 제사장의 직무에 대한 표현일 뿐, 삶을 바꾸는 능력은 없습니다 (히 8:5, 10:1, 4). 따라서 율법을 아무리 열심히 지켜도 인간의 마음을 괴롭히는 양심의 가책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히 9:9-10)

그러나 예수그리스도의 참된 제사는 양심을 깨끗케 합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히 9:14)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 양심에 뿌려질 때, 우리 양심은 더 이상 과거에 지은 죄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고, 이렇게 마음에 평안을 얻어야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되는 법이죠.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해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담대하게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히 11:19, 20 )

우리가 자신을 바라본다면 결코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합니다. 시편기자가 말했듯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시 130:3).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기 원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 12:2)


예수는 믿음의 주(원어의 의미로는 '시작하는 이')요 온전케 하시는 이('완성하는 이')이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믿음을 갖게 인도하신 분이고, 또한 언젠가 우리 믿음이 완성되도록 지금도 우리를 이끄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눈을 그분께 맞추고 그분이 어떠한 일을 하셨는지, 그분이 누구신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분을 바라보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의 임재 가운데로 초청하십니다 (히 10:22, 4:16). 우리는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는 없습니다. 오직 '예수를 바라보는' 자만이 하나님의 임재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담대히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시선을 우리 자신으로부터 돌려 예수께 고정시킨다면 우리는 참으로 자유롭게 되고, 하나님의 임재가운데서 그분과 교제하는 즐거움을 누릴 것입니다.

예수를 바라보며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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