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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1.24 감사하라!
  2. 2007.12.22 [단어 연구] 은혜

감사하라!

카테고리 없음 2008. 1. 24. 14:14
저는 사람들을 만나 하나님의 말씀에 나온 진리를 나누기 좋아합니다. 특히 여러 사람들 앞에서 강의를 통해 진리를 전달하기 좋아하죠. 하지만 제가 강의할 기회는 극히 적습니다. 특히 강사가 부족한 외국 보다, 강사가 넘처나는 한국내에서는 더 적은 느낌입니다.

처음에는 이러한 상황이 답답하기도 했고, 왜 나는 강사로 인정받지 못할까를 고민해 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강의를 할 기회가 적었던 것은 나름대로 내게 축복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강의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다른 길을 찾았고, 그 결과가 블로그 운영이었습니다. 작년 10월말에 세상을 바꾸는 블로그를 공개했는데, 2개월의 활동만으로 올블로그 탑 100 블로그에 선정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블로거뉴스의 베스트 블로그 기자에 뽑히기도 했죠. 앞으로도 블로그 운영을 열심히 한다면 강의를 통해 사람을 만나는 것 보다 훨씬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생각해 본다면 저는 옛날 부터 새로운 형식의 사역을 하기 원하는 마음이 강했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에서 썼듯, 시대가 변하면 사역의 형식도 변해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었죠. 그런데 강의는 새로운 형식은 아닙니다. 제가 만약 강사로 인정받는 사람이었다면, 옛 형식에 안주하고 말았겠죠. 그러고 본다면 강사로 인정되지 않은 것은 정말 "blessing in disguise" (변장한 축복)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삶의 많은 어려움은 사실 우리를 돕는 귀중한 보배와 같습니다. 우리는 먼 미래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눈앞의 어려움을 보며 괴로워합니다. 하지만 멀게 볼 때, 우리의 삶은 감사할 조건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범사에 감사하는 삶이야 말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살전 5:18). 우리는 많은 상황에서 감사하기 보다는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한다면, 우리는 참으로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감사할 때, 우리는 어려움의 의미를 발견하고 더욱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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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 연구] 은혜

카테고리 없음 2007. 12. 22. 16:11
구약에서 은혜라는 의미로 사용된 히브리 단어는 chen으로 69번 등장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단어는 거의 늘 matsa라는 동사(에스더서에서는 matsa가 nasa로 대치되는 경우가 세 번 있다)와 함께 사용되어, '은혜를 입었더라'는 구절의 형태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 경우 chen의 의미는, 한국어의 '좋게 봐줌, 예쁘게 봐줌'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예쁘게 봐주다'는 표현과 관련해서, chen이 문자적으로 예쁘다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고운 것(chen)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잠 31:30)). 즉, 윗 사람이 아랫 사람을 대할 때, 여러 명이 잘못해서 벌을 줄 때도, 그중 한 명은 착해서 그런 일에 참여할 사람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으면 그 사람에게는 벌을 주지 않을 것이고(창 6:8) 그런 사람이 부탁하는 것이면 거절하기 힘들어서라도 들어줄 것이다(삼하 14:22) 또한 이렇게 윗사람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은혜 받기를 원하는 것'이라고 묘사된다(창 32:5)

이렇게 비교적 단순하던 구약의 '은혜'라는 개념은 신약 시대에 와서 큰 변화를 겪게 된다. 그리고 그 시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으로 말미암는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4, 16-17)


율법을 어긴 죄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 덕에 구원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의 복된 소식은 '은혜의 복음'(행 20:24)이라고 불리운다.

그러나 은혜는 죄인을 구원하는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신학자들은 우리가 칭의(justification)을 거쳐 성화(sanctification)의 과정을 통과하고 있으며, 언젠가 영화(glorification)에 이르게 되리라고 말한다. 그런데 은혜는 칭의의 단계에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세 단계 전체에 걸쳐 우리에게 주어진다.

  • 칭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엡 1:7)
  • 성화-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행 20:32)
  • 영화-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벧전 5:10)
은혜는 심지어, 바울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가 모태에 있을 때 부터 역사한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갈 1:15)


Thayer's Greek English Lexincon은 은혜(charis)를 이렇게 정의한다

good will, loving-kindness, favour of the merciful kindness by which God, exerting his holy influence upon souls, turns them to Christ, keeps, strengthens, increases them in Christian faith, knowledge, affection, and kindles them to the exercise of the Christian virtues.)


은혜는 이처럼 죄인을 회개케 하고, 거룩한 삶으로 유도하여, 결국 죄로 인해 이룰 수 없었던 '하나님의 영광'(롬 3:23)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따라서 그분은 모든 신자의 삶 가운데 지금도 은혜를 베풀고, 즉 그분의 계획을 이뤄가고 계신다. 그리고 우리가 해야하는 일은 이러한 그분의 은혜를 받는, 즉 주님의 역사를 따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그분의 계획 가운데로 이끈다. 그에 비해 우리의 잘못된 태도는 우리를 그분의 은혜에서 멀어지게 만든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서 먼 삶을 살 때, 우리는 '은혜에 이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히 12:15)

그에 비해, 우리가 우리를 인도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계속적으로 따라간다면, 우리의 마음은 믿음 위에 굳건히 서게 되는 것이다.

여러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히 13:9)

바울이 육체의 가시에 대해 기도하며 받은 응답의 말씀도 은혜에 관한 것이었다. 그가 육체의 가시로 인해 고통당할 때, 그래서 이것을 제거해 달라고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하셨다. 다른 말로 하자면, '나는 지금 네게 충분한 은혜를 주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의 이 고통은 그가 회개하거나 영적전쟁으로 싸워 이겨야할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계획의 한부분이라는 뜻이었다. 바울 자신이 설명하지만, 이 고통은 그가 많은 계시를 받음으로 인해 교만케 됨을 방지하기 위한 안전장치로서, 그에게 주어진 은혜의 한부분이었다는 것을 그는 나중에야 깨달은 것이다.

바울은 이처럼 그의 인생 가운데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의미를 깊이 깨달았기에,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 15:10)

즉,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형성된 삶을 살게 되었고, 그것이 감사하여 주를 위해 누구보다 더 많이 일하였지만, 그러한 노력조차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크리스천의 삶에서 은혜가 이렇게 중요한 것이기에, 바울은 그의 모든 서신서를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간구함으로 시작하였고, 특별히 고린도후서와 에베소서는 편지의 종결도 은혜의 강구로 끝맺고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찌어다 (고후 13:1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찌어다 (엡 6:24)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해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 4:16)

우리가 그분께 은혜를 구할 때, 그분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실 것이다. 그분의 은혜는 우리의 인생을 향한 그분의 master-plan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단지 순간의 어려움을 이겨낼 꾀가 아니라, 우리의 인격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하고, 우리의 삶의 거룩하지 못한 부분이 제거되도록 도와줄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은혜의 기쁨을 맛보게 된다면, 우리는 정말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사는 것이며, 우리가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어리석은 잘못은 그분의 은혜에 저항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은혜가 우리 인생에 있어서 이렇게 귀중한 것이기에, 우리는 은혜를 받을 방법을 찾게 된다. 영어에서 'means of grace'(요즘은 잘 사용하지 않지만 청교도들은 많이 사용한 표현)이라는 것이 바로 이 '은혜 받는 방법'을 뜻하는 것인데, 성경 읽기, 기도, 경건서적 읽기, 예배 등이 이에 해당한다. 즉 이런 일들을 행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고, '은혜로써 굳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 때, 우리는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된다. 다음 구절을 살펴보자.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찌니 (히 12:28)


많은 유럽어에서 은혜는 감사와 동의어로 쓰인다(불어-merci, 이태리어-grazie, 스페인어-gracias 등) 그리스어에도 동일한 용법이 존재하는데, 여기서 '은혜를 받자'고 번역된 에코 카린(echo charin)이라는 구절은 눅 17:9에서 '사례하다'(즉, 감사하다)로 번역된 것과 같은 구절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은혜를 받자'는 말은, '감사하자'는 말과 같다는 것이다(실재로 NIV, NASB, NLT등 대부분의 현대 번역본들은 이 구절을 '감사하자'는 의미로 번역한다). 성경은 감사에 대해 많은 강조를 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감사는 우리가 은혜를 받을 때만 가능하다. 은혜는 받지 않고, 율법적으로 감사만 드리려는 것은 결국 우리를 은혜에서 더 멀어지게 만들 뿐이다.

하나님을 찾는 자,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원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것이다. 그리고 이 은혜는 우리를 결국 그분의 영광으로 인도할 것이다. 그분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 지상에서의 삶부터 영광에서 영광으로(고후 3:18) 변하여지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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