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역'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08.01.01 삶의 균형
  2. 2007.12.21 아버지의 마음을 품은 사역자
  3. 2007.12.19 여유
  4. 2007.12.17 서른 즈음에...(2001년에 쓴 글)
  5. 2007.12.16 두려움

삶의 균형

카테고리 없음 2008. 1. 1. 00:31
사역자로 10년 이상 일하면서, 절실히 깨닫는 한가지는 장기사역을 생각한다면 늘 균형잡힌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삶의 균형이 무너진다면, 오래 사역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겠죠.

한국에서 처음 대학사역을 할때, 대학사역의 분위기를 따라 저도 참 정신없이 바쁘게 살았습니다. 연일 이어지는 사역, 불규칙한 스케쥴, 밤늦게 시작되는 교제의 시간... 물론 운동은 꿈도 꾸지 못할 상황이었죠. 뭐 엄밀히 말하면 다 주를 위해, 그리고 학생들을 위해 그렇게 한 것이니 잘못은 아니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너무 내 자신을 돌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겨울 전도여행이나 여름 MC 한번 치르고 나면 지쳐서 탈진하곤 했죠. 이처럼 극단적으로 올라갔다 극단적으로 내려가는 삶이 결국은 몸에 무리를 주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스위스의 유명한 상담가이면서 의사인 폴 투르니에가 쓴 인격 의학 (Medicine de la Personne)을 읽으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인간의 질병은 결국 지나친 열정 (passion)에서 나온다. 꼭 음식에 대한 것 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과식은 좋지 않은 결과를 낳는다. 심지어 운동이 결여된 지나친 독서도 이런 부류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책을 좋아하는 저에게는 참 마음에 와닿는 말입니다. 교회가 금연을 주장하는 것은 그것이 몸에 해롭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운동의 부족이나 과식 또한 같은 수준으로 정죄(?)되어야 마땅할 것인데, 담배를 피는 사람은 대단히 문제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밥을 매 끼 두그릇씩 먹는 사람은 '거참 밥 맛있게 먹는다'고 칭찬하는 태도는 올바르지 못하겠죠.

바울은 '우리는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이다'고 말했습니다 (갈 5:24). 그런데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에 아직도 욕심이라는 것이 참 많이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밤에 인터넷을 하다보면 잘 시간이 넘었는데도 인터넷을 끊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것 때문에 묵상 시간이 지장을 받고, 수면이 부족하여 건강에 해를 받으면서도 욕심대로 살지 않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공부 할때도 학점 좀 더 높게 받고 싶은 욕심, 사업 할 때도 돈 좀 더 벌고 싶은 욕심, 교회에서도 좀더 인정받고 싶은 욕심에 우리는 우리 몸을 혹사하고, 그 결과는 중년 이후의 심각한 질병으로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다가오는 새해에는 좀더 균형 잡힌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겠습니다. 식사에 관해서도, 수면에 관해서도, 운동에 관해서도, 일에 관해서도 균형있게 살아야 겠다고 생각합니다. 주를 섬기는 것이 단거리가 아니라 장거리 경주라면 지금부터 올바른 속도로 뛰는 것이 중요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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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마음을 품은 사역자

카테고리 없음 2007. 12. 21. 21:00
제가 10년간 YWAM에서 간사 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프랑스에서 DTS 간사로 섬기던 2003년입니다. 이 때 우리 전도여행팀에 한 미국인 학생이 있었는데, 그는 내게 매우 거친 말과 행동으로 대했고, 나는 내가 저지르지 않은 잘못에 대해 벌 받는 것 같아 매우 감정이 상했죠.

그가 나를 그렇게 미워한 이유는 내가 그의 아버지를 연상케 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감정적으로 매마른 목사님이었는데, 나이가 아주 많았을 때, 그를 낳았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중년이 되어 낳은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찌 몰라 거리감을 두었고, 그는 버려졌다는 상처를 안고 자랐죠. 그리고 DTS에 와서 권위자인 나를 보니까 아버지에 대한 미움의 감정이 몰려와 나를 미워할 수 밖에 없었지요.

저는 그 학생을 놓고 많은 고민을 해야 했습니다. 따끔하게 꾸짖으면 정신을 차릴까. 나를 괴롭히지 말라고 마음을 터 놓고 부탁을 해볼까. 아니면 그런 사람이 없는 듯 무시해 버릴까... 그런데 하나님이 제게 "저 아이가 왜 네게 그렇게 행동하는지 아느냐?"라고 물으시더군요. 하나님은 "저 아이는 아버지로 부터 사랑을 못 받아 마음이 상하였고, 너라는 권위자를 만나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경험하고 싶은 마음에 저렇게 행동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그는 내가 무조건 밉겠지만, 사실 그의 마음속은 아버지의 사랑을 향한 갈망이 너무도 크기에 뒤틀려진 행동을 하는 것이었죠.

그때 저는 사역에 있어서 사랑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올바르게 자라려면 사랑을 받는 경험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자라나면서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부족하고, 그러한 사랑의 결핍은 누군가 그 사람을 사랑하기 전 까지는 인생의 가장 커다란 문제로 남기 마련입니다. 그러한 사람을 사랑해 주는 것이 바로 사역자의 역할이겠지요 특히 요즘처럼 부모의 사랑을 모르고 자란 세대에게는 더욱 부모의 역할을 해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저의 인간관계의 기본은 'give and take'였던 것 같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 내게 잘 해주는 사람에겐 나도 잘해주고, 내 마음에 안드는 사람, 내게 상처주는 사람은 무시하고 멀리 했죠. 예전에는 그게 옳은 태도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특히 사역자가 사역의 대상자에게 사랑을 베풀 용의가 없다면, 이는 온전한 사역자의 태도가 아닐 것입니다. 마치 부모가 오래 참음으로 자식이 성년에 이르도록 도와주듯, 사역자라면 아비의 마음을 가져야 사역의 대상이 자라날 수 있겠죠.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스승은 많지만 아비는 여럿이 아니다. 너희 아비는 바로 나다'라고 말했습니다 (고전 4:15). 많은 교회를 세운 바울은 결국 그 교회들에 의해 다 버림 받고, 늘 외로움과 거절감과 싸워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늘 '아비의 마음'을 잃지 않았고, 그렇기에 자신있게 '나는 너희의 아버지다'고 말할 수 있었죠. 제가 계산적인 태도로 학생들을 대한다면, 제 감정은 보호가 되고, 사역도 효과적으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버지의 마음은 배울 수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점에서 프랑스 DTS에서 겪은 힘든 경험은 하나님이 제게 아버지의 마음을 가르치시고자 특별히 준비한 귀중한 기회였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30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더욱 성숙한 마음을 품기 원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으로 사역의 대상을 포용하고, 감싸주고, 그들이 성숙하도록 인내로 도와주는 자가 되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가능토록 은혜를 주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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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

카테고리 없음 2007. 12. 19. 00:01
예술가를 분류해보면 크게 세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죠. 첫번째는 모짜르트처럼 어릴때 부터 천재적인 재능을 보이지만 젊어서 죽고 마는 형, 두번째는 바하처럼 처음에는 그냥 그렇지만 오랜 기간동안 노력을 다하여 결국 높은 예술적 경지에 이르는 형, 세번째는 바로 피카소 처럼 타고난 재능이 뛰어날 뿐 아니라 명도 길어 수많은 명작을 남기는 형입니다. 이런 세 번째 유형의 예술가들은 말년으로 갈수록 재능과 연륜이 어울어진 작품을 남기기 때문에 이들이 남긴 말년의 작품은 참으로 감동을 일으키는 힘이 큽니다.

제가 좋아하는 피아니스트 Vladimir Horovitz도 세 번째 유형의 예술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젊었을 때부터 천재 피아니스트로 널리 인정을 받은 그는 80이 넘어서까지 공연을 하였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젊어서는 고난도의 테크닉을 요구하는 리스츠의 곡들을 연주하길 즐겼던 그가 말년에 이르러서는 초등학생도 연주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한 슈만의 '트로이메라이'를 가장 많이 연주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연주하는 트로이메라이를 들어보면 정말 평생을 피아노와 함께 살아온 대 예술가의 연륜이 단순한 선율을 통해 아름답게 표현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더이상 어려운 곡을 연주해서 누구한테 인정받을 필요가 없어진 지금, 그는 한껏 여유롭게 어린이의 곡을 진심으로 즐기며 연주할 수 있는 것이지요.

전에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Minority report'를 보며, 스필버그도 어느새 거장의 여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젊어서 죠스, ET등을 만들며 엄청난 대중적 성공을 누렸고, Schindler's List, Saving Private Ryan 등으로 예술적인 재능도 인정 받았으며, Dreamworks 를 설립하여 재정적인 안정도 얻은 지금, 그는 어떤 걱정도 없이 자신의 영화적 재능을 표현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여유로운 마음가짐으로 영화를 만들면 영화의 수준이 더욱 높아지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지난 2003년 프랑스에서 사역을 마치고 돌아오며 가장 크게 든 생각은, '이제 나도 좀 여유를 갖고 살아보자'는 것입니다. 사람이 젊으면 더 치열하게 사는 것이 정상이겠죠. 생각도 극단적으로 하고, 말도 극단적으로 하고... 그런데 나이를 먹으면 '아, 꼭 그것이 옳은 것은 아니구나' 하고 생각하는 단계가 오는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방향이 틀린 것은 아닌데, 똑같은 방향을 계속 가야 하는 것은 맞는데, 좀더 여유롭게 걸어가도 되는거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것이지요.

광고도 보면 작은 회사는 강하고 자극적인 광고를 합니다. 여유가 있는 회사는 광고도 여유롭습니다. 코카콜라 광고를 보면 곰 몇마리가 장난치다가 콜라 마시고 끝납니다. 나이키광고는 작대기 인간이 동네 총각들이랑 농구하는 것이 전부이지요. 전에 나온 IBM광고는 엄마 코끼리랑 아기 코끼리가 걸어가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내가 만들어 온 인생의 광고는 어떤 색깔이었나 반성해 봅니다.

어린 나무는 쑥쑥 자랄지 몰라도 그 밑에 그늘이 없습니다. 오래된 나무는 성장하지 않는 것 같아도 그늘이 있어서 많은 이들에게 휴식을 주게 됩니다. 나는 어떤 나무인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지금까지 쑥쑥 자라는 젊은 나무였다면, 이제는 성장의 속도보단 그늘의 넓이를 생각하는 새로운 태도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외칠 수도 있는 것을 조용히 말하는 여유. 뛰어갈 수도 있는 거리를 걸어가는 여유. 남에게 손해를 당해도 웃고 용서해주는 여유... 이렇게 여유 있는 인간이 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내게 와서 쉼을 얻고 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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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즈음에...(2001년에 쓴 글)

카테고리 없음 2007. 12. 17. 00:11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히 3:1)

I.
먼 옛날 중학교때 배웠던 시 중에 '서러운 서른 살'이라는 구절이 나오는 작품이 있었지요. 열 댓살 쯤 되었던 저로서는 '왜 서른 살이 서러워야 하는가'에 대해 이해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이제, 우리 나이로 서른 살을 지나 만 서른 살이 되는 해에 접어들면서 생각해 보니 서른 살이 서러운 이유에 대해 알 것 같다고 느껴집니다. 우선, 서른 살은 20대의 꿈과 낭만을 상실한 채,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나이이고,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이들이 이루어 놓은 많은 것들(가정, 재산, 지위 등)을 이루지 못하였기에 자신이 기성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위치하였음을 확인하는 나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20대의 꿈도, 40대의 현실적 성취도 가지지 못한, 중간에 낀 샌드위치 같은 나이라는 것이지요. 그렇게 본다면 서른 살이 서럽게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II.
저는 내년부터 시작될 본격적인 사역을 앞두고, 왜 예수님이 30세에 사역을 시작하셨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됩니다(눅 3:23).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지만, 동시에 인간이셨고, 인간으로서 육적, 영적 사회적 성장을 경험한 분이셨습니다(눅 1:52). 예수님은 처음부터 자신의 사역 기간이 그리 길지 않으셨음을 아셨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분이 서른 살에 사역을 시작하시기로 결정하신 것은, 서른 살이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는 때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그분 보다 두 세 살 정도 어렸을 제자들은, 3년의 훈련 기간이 끝나고 서른 즈음에 사도로서 자신들의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서른 살은 사역을 준비해온 사람이 사역을 시작하기에 가장 좋은 나이로도 보입니다. 아직 20대의 체력과 열정, 그리고 이상이 남아 있는 시기이고, 또한 많은 실수를 통해 20대의 미숙함을 벗어 버렸을 나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저의 사역이, 많은 기다림 끝에, 서른 즈음에 시작하게 된 것은 바로 이 때가 가장 하나님이 보시기에 적절한 때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III.
저는 요즘 '사도'라는 개념에 대해 많이 생각해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교회 가운데 사도의 직위를 복원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앞으로 몇 십년간, 우리는 지금까지 보아온 전례가 없는 놀라운 사도들의 출현을 보게 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저는 또한 주께서 약속하신 '늦은비'가 내릴 때가 다가왔으며, 지금 이 비가 내리고 있다고 믿습니다(슥 10:1). 오순절 다락방에 내렸던 '이른비'가 교회의 시작점이 되었듯, 이 늦은비는 교회를 완성시키게 될 것입니다 지금 이 말이 잘 이해가 안되신다 할찌라도, 몇년 내에 모든 사람이 인정할 수 있을 정도의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전세계 교회 가운데 놀랍게 펼쳐지리라고 믿습니다. 이것은 교회 역사에 가끔씩 있었던 부흥의 차원을 넘어서, 역사의 완성을 위하여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되기에 부족함 없도록 준비시키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흥분되지 않으십니까? 우리는 늘 꿈꾸던 대사명의 완수와 역사에 전례가 없었던 영적 대각성을 곧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놀라운 부흥의 한가운데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보게될 사도들은 그 숫자와 규모 면에서 초대 교회의 사도들을 훨씬 뛰어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세대'를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IV.
하나님은 제게 이러한 놀라운 때를 위해 자신을 준비할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저 또한 이러한 놀라운 부흥의 때에 해야할 일들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그러한 약속의 말씀을 믿습니다. 저는 제가 이방의 빛으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믿습니다. 현실이 어떠하든지, 다른 사람들이 절 어떻게 보던지 저는 이러한 약속을 통해서만 나 자신을 보기 원합니다. 그리고, 매일의 삶 가운데 이러한 약속의 성취를 염두에 두고 생활하기 원합니다. 그러고 보니, 서른 살이 그리 서럽게만 느껴지지는 않는군요. 하나님의 약속을 따르는 삶에 있어 서른 살은, 그리고 서른 한 살은, 또 하나의 축복된 시간이라고 믿습니다.

V.
제가 읽었던 중학교 참고서에 따르면 시인이 '서러운 서른 살'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중 하나는 이 표현이 시옷(ㅅ)을 반복함으로 청각적 효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저는 동일한 청각적 효과를 지녔지만 훨씬 진취적인 '사도적 서른 살'이라는 표현을 쓰기 원합니다. 사도적 서른 살...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 믿는 도리의 사도이신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한 나이에 저 또한 공적인 사역에 들어갑니다. 아주 작은 부분이나마 예수님을 닮을 수 있어 무척이나 기쁩니다. 이제 하나님을 향한 사랑, 자신의 사역과 사역의 대상인 사람들에 대한 전적인 헌신, 그리고 쉼 없는 경건의 삶이라는 훨씬 중요한 영역에 있어서도 예수님의 모범을 닮게되기를 바랍니다. 다가오는 새해는 이러한 소망들이 이루어지는 시간이기를 기도합니다.

저와 여러분을 통하여 그분의 나라를 이루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2001년을 보내고 2002년을 맞으며

성원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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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

카테고리 없음 2007. 12. 16. 01:45
프랑스 YWAM에서 간사로 일하던 저는, 1996년 크리스마스를 스위스의 노샤텔이라는 아름다운 도시에서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집이 있는 장-피에르와 마들린이 저를 집으로 초청했기 때문이죠. 마침 크리스마스 동안 머물 곳을 찾던 저는 그들의 제안을 고맙게 받아들였고, 결국 그곳에서 열흘 정도 머물렀습니다. 제게는 그 기간이 곧 시작할 DTS를 준비하기 위한 충전의 시간이 되었죠.

저를 그곳에 초대한 장-피에르와 마들린 부부는 아프리카에서 여러 해 동안 선교사로 일하던 분들로, 성품이 온화하고 사람을 매우 편안하게 해주는 은사가 있었습니다. 제가 노샤텔에 머무는 동안도 제가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들과 교제하면서 이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이 부부는 각각 매우 힘든 결혼 생활 끝에 이혼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들이 지금처럼 온화하고 따뜻한 모습을 갖게 된 것은 큰 고통을 기도로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서라고 합니다. 그들이 지금 상담학교의 간사로 일하게 된 것도 그들이 이처럼 힘든 경험을 했기에 다른 사람을 돕기 원하는 마음 때문이었죠.

프랑스 YWAM에서 만난 또 다른 사역자인 제라르의 이야기는 좀 더 극적입니다. 제라르는 DTS 교장을 지냈고, 베이스 지도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저는 연말을 맞아 간사 송년회에 참석했을 때 그의 옆에 앉았다가 그의 놀라운 과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프랑스 남부에서 태어났는데, 어릴 때 부모가 죽고, 고아원에서 자라게 되었습니다. 그는 고아원에서 매우 즐겁게 살았고, 사람들이 상상하듯 힘든 일은 없었다고 합니다. 문제는 그가 성인이 되어 고아원에서 나온 후, 나쁜 친구들의 꾐에 빠져 범죄의 길로 접어들게 된 것입니다. 어느 날 그는 친구들과 물건을 훔치고 있었는데, 갑자기 나타난 중무장 경찰들에 의해 체포되었습니다. 당시 그는 군에서 복무하던 중이었기에 문제가 매우 커질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그의 상관이 잘 무마해서 다행히 처벌을 면했다고 합니다. 그 이후, 그는 어떤 여자를 사귀게 되었고, 그 여자의 부모와 친해져서 결국 그 부모가 그를 양자로 받아들였고, 많은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주께 돌아와 지금은 YWAM에서 주를 섬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저와 함께 그의 이야기를 들은 윌리엄은 나중에 제게 "나는 그가 크리스천 가정에서 아무 문제없이 자라온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더군요. 저라도 그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면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도 장-피에르와 마들린 부부처럼 사람이 겉으로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았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다른 삶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90년대에 방영하던 21세기 위원회라는 프로그램에서 본 환경미화원인데,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활동을 많이 해서 칭찬 릴레이의 주인공으로 뽑혔던 인물이지요. 진행자가 그를 찾아가자, 그는 자신이 매주 5kg의 소고기를 사다가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최근엔 수기 공모전에 글을 써 탄 상금 20만 원에다가 자신의 돈 10만 원을 보태서 기부했다고 신이 나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과거에 술에 절어 폐인처럼 사는 ‘개고기’(그의 표현) 었지만, 이제 신앙의 힘으로(그의 목에는 십자가가 걸려 있었습니다) 완전히 변화되어 이제는 새로운 삶을 산다고 말했습니다.

방송이 끝날 즘, 그는 카메라에 대고 아이들에게 "중간고사 잘 봐 아버지 좀 기쁘게 해다오" 하고 말한 후, 갑자기 울먹이는 목소리로 집을 나간 아내에게 호소했습니다. ‘여보, 지난 십 년간 당신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소. 나는 요즘도 매일 당신이 집에 돌아오도록 기도한다오. 부디 이 방송을 보거든 꼭 돌아오도록 하오. 당신만 돌아온다면 모든 일이 잘되는 것이오.’ 그는 눈물을 흘렸다. 그의 아내는 아이들이 여섯, 일곱 살 때 집을 나갔다고 합니다. 그는 쓰레기차를 몰고 다니면서 아이들을 키웠다고 합니다. 남들을 위해 많은 선행을 하는 그에게, 그렇게 가슴 아픈 사연이 숨어있던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남을 부러워하면서 삽니다. 이 사람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고, 저 가정은 절대 싸움이 없을 것처럼 보이며, 저 목사님은 신앙의 회의 같은 것은 없을 것처럼 보이죠. 하지만, 이처럼 우리가 부러워하는 모습은 실은 우리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입니다. 모든 인간은 어두운 과거, 잊고 싶은 기억, 떨쳐버리기 어려운 죄책감이 있고,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죠. 아무리 완벽해 보이는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나만 빼고 다른 사람은 다 훌륭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연약한 모습은 감추고, 남의 위대한 모습만 따라가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다 보면 자신의 진실한 모습은 더욱 드러내기 어려워지고, 남이 나의 문제를 알게 되면 어떻게 할까 하는 두려움만 커집니다.

만약 우리가 더 이상 꾸밈 없이, 더 이상의 남에 대한 환상 없이, 자신과 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다른 곳은 몰라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는 누구나 비판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드러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할 때, 모든 가식을 제거한 참된 성도의 교제가 가능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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