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8.01.03 마음의 눈
  2. 2007.12.22 [단어 연구] 은혜
  3. 2007.12.16 Simplicity in Christ

마음의 눈

카테고리 없음 2008. 1. 3. 14:54
I.
아람왕은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이다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는 장수들을 모아 놓고, "여기에서 적을 매복하자"고 결정하고 나면, 적은 꼭 그곳을 피해 다녔기 때문이었죠. 그는 "우리 중에 누군가 첩자가 있다"고 생각하였지만, 그의 신하들은 "첩자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사가 우리의 회의 내용을 알아차리는 능력 있는 것입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여 이기려면 엘리사를 먼저 죽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큰 군대를 이끌고 엘리사가 있던 도단성을 둘러쌉니다.

엘리사의 종은 아침에 일어보니 성 주변에 가득한 대군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이들이 분명히 엘리사를 죽이려 왔고, 따라서 자신도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죠. 그는 말합니다, "아아, 주인님, 이제 어떻게 합니까..."

엘리사는 답합니다. "걱정하지 마라. 우리와 함께한 군대가 저들보다 더 많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종의 눈을 뜨게 하시도록 기도합니다. 그가 기도를 마쳤을 때, 종은 눈이 열리며 산에 가득한 불말과 불병거를 봅니다. 엘리사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단지 종의 눈이 밝지 못해 그러한 사실을 몰랐을 뿐입니다 (왕하 6:8-17).

II.
야곱은 하란으로 가던 중 해가 지자 돌을 베개 삼아 베고 누웠습니다. 하지만 그는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얼마전 어머니의 지시대로 아버지를 속여 형의 축복을 받았고, 형은 그 일로 분이 풀리지 않아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너는 형처럼 이 지역 여자들이랑 결혼하지 말고 멀리 있는 우리 일족의 여자와 결혼해 오거라"하고 명령하였기에 먼 길에 나섰습니다. 그는 가진 것도 없었고, 가족도 없었고, 계획도 없었습니다. 오직 불확실한 미래만이 그 앞에 놓여 있었죠.

그는 꿈을 꿉니다. 눈 앞에는 사다리가 보이고, 사다리 위로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음성이 그의 귀에 들립니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그는 깜작 놀라 꿈에서 깹니다. 그는 말합니다. "아, 여기는 하나님이 계시는 땅인데, 내가 몰랐구나." 그는 자신의 삶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창 28:1-22)

III.
글로바는 친구와 함께 예루살렘에서 걸어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며칠 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셨다는 여자들의 말이 사실일찌에 대해 친구와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었죠.

그런데 어느새 옆에 한 사람이 나타나더니 말을 겁니다 "무슨 일이 있나요?" 그는 이 사람에게 나사렛 예수의 죽으심에 대해, 그리고 그분을 봤다는 목격자들의 증언에 대해 말합니다. 이 사람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면 죽었다 부활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소? 이는 이미 율법에 예연한 바입니다" 하고 설명해 줍니다. 그는 그의 설명을 들으며, 예수의 죽음이 단지 우연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숙명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글로바와 그의 친구는 이 사람을 붙잡고, "우리와 함께 머물면서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오" 하고 간청을 합니다.

결국 이들은 함께 식사를 하게 되는데, 이 사람이 떡을 떼는 손에 난 못자국을 보고, 글로바와 그의 친구는 깨닫습니다.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설명해준 이 사람은 바로 그리스도 그분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증거합니다. (눅 24:13-35)

IV.
우리는 우리의 인생이 어둡고 힘들다고 느끼지만, 문제는 인생이 아니라 마음의 눈이 닫힌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의 눈을 뜰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 옆에 계신 그리스도를 보고, 우리 인생의 의미를 새롭게 깨달을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 1:18-19)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의 눈을 밝히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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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 연구] 은혜

카테고리 없음 2007. 12. 22. 16:11
구약에서 은혜라는 의미로 사용된 히브리 단어는 chen으로 69번 등장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단어는 거의 늘 matsa라는 동사(에스더서에서는 matsa가 nasa로 대치되는 경우가 세 번 있다)와 함께 사용되어, '은혜를 입었더라'는 구절의 형태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 경우 chen의 의미는, 한국어의 '좋게 봐줌, 예쁘게 봐줌'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예쁘게 봐주다'는 표현과 관련해서, chen이 문자적으로 예쁘다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고운 것(chen)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잠 31:30)). 즉, 윗 사람이 아랫 사람을 대할 때, 여러 명이 잘못해서 벌을 줄 때도, 그중 한 명은 착해서 그런 일에 참여할 사람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으면 그 사람에게는 벌을 주지 않을 것이고(창 6:8) 그런 사람이 부탁하는 것이면 거절하기 힘들어서라도 들어줄 것이다(삼하 14:22) 또한 이렇게 윗사람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은혜 받기를 원하는 것'이라고 묘사된다(창 32:5)

이렇게 비교적 단순하던 구약의 '은혜'라는 개념은 신약 시대에 와서 큰 변화를 겪게 된다. 그리고 그 시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으로 말미암는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4, 16-17)


율법을 어긴 죄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 덕에 구원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의 복된 소식은 '은혜의 복음'(행 20:24)이라고 불리운다.

그러나 은혜는 죄인을 구원하는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신학자들은 우리가 칭의(justification)을 거쳐 성화(sanctification)의 과정을 통과하고 있으며, 언젠가 영화(glorification)에 이르게 되리라고 말한다. 그런데 은혜는 칭의의 단계에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세 단계 전체에 걸쳐 우리에게 주어진다.

  • 칭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엡 1:7)
  • 성화-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행 20:32)
  • 영화-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벧전 5:10)
은혜는 심지어, 바울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가 모태에 있을 때 부터 역사한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갈 1:15)


Thayer's Greek English Lexincon은 은혜(charis)를 이렇게 정의한다

good will, loving-kindness, favour of the merciful kindness by which God, exerting his holy influence upon souls, turns them to Christ, keeps, strengthens, increases them in Christian faith, knowledge, affection, and kindles them to the exercise of the Christian virtues.)


은혜는 이처럼 죄인을 회개케 하고, 거룩한 삶으로 유도하여, 결국 죄로 인해 이룰 수 없었던 '하나님의 영광'(롬 3:23)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따라서 그분은 모든 신자의 삶 가운데 지금도 은혜를 베풀고, 즉 그분의 계획을 이뤄가고 계신다. 그리고 우리가 해야하는 일은 이러한 그분의 은혜를 받는, 즉 주님의 역사를 따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그분의 계획 가운데로 이끈다. 그에 비해 우리의 잘못된 태도는 우리를 그분의 은혜에서 멀어지게 만든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서 먼 삶을 살 때, 우리는 '은혜에 이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히 12:15)

그에 비해, 우리가 우리를 인도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계속적으로 따라간다면, 우리의 마음은 믿음 위에 굳건히 서게 되는 것이다.

여러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히 13:9)

바울이 육체의 가시에 대해 기도하며 받은 응답의 말씀도 은혜에 관한 것이었다. 그가 육체의 가시로 인해 고통당할 때, 그래서 이것을 제거해 달라고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하셨다. 다른 말로 하자면, '나는 지금 네게 충분한 은혜를 주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의 이 고통은 그가 회개하거나 영적전쟁으로 싸워 이겨야할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계획의 한부분이라는 뜻이었다. 바울 자신이 설명하지만, 이 고통은 그가 많은 계시를 받음으로 인해 교만케 됨을 방지하기 위한 안전장치로서, 그에게 주어진 은혜의 한부분이었다는 것을 그는 나중에야 깨달은 것이다.

바울은 이처럼 그의 인생 가운데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의미를 깊이 깨달았기에,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 15:10)

즉,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형성된 삶을 살게 되었고, 그것이 감사하여 주를 위해 누구보다 더 많이 일하였지만, 그러한 노력조차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크리스천의 삶에서 은혜가 이렇게 중요한 것이기에, 바울은 그의 모든 서신서를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간구함으로 시작하였고, 특별히 고린도후서와 에베소서는 편지의 종결도 은혜의 강구로 끝맺고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찌어다 (고후 13:1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찌어다 (엡 6:24)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해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 4:16)

우리가 그분께 은혜를 구할 때, 그분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실 것이다. 그분의 은혜는 우리의 인생을 향한 그분의 master-plan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단지 순간의 어려움을 이겨낼 꾀가 아니라, 우리의 인격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하고, 우리의 삶의 거룩하지 못한 부분이 제거되도록 도와줄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은혜의 기쁨을 맛보게 된다면, 우리는 정말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사는 것이며, 우리가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어리석은 잘못은 그분의 은혜에 저항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은혜가 우리 인생에 있어서 이렇게 귀중한 것이기에, 우리는 은혜를 받을 방법을 찾게 된다. 영어에서 'means of grace'(요즘은 잘 사용하지 않지만 청교도들은 많이 사용한 표현)이라는 것이 바로 이 '은혜 받는 방법'을 뜻하는 것인데, 성경 읽기, 기도, 경건서적 읽기, 예배 등이 이에 해당한다. 즉 이런 일들을 행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고, '은혜로써 굳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 때, 우리는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된다. 다음 구절을 살펴보자.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찌니 (히 12:28)


많은 유럽어에서 은혜는 감사와 동의어로 쓰인다(불어-merci, 이태리어-grazie, 스페인어-gracias 등) 그리스어에도 동일한 용법이 존재하는데, 여기서 '은혜를 받자'고 번역된 에코 카린(echo charin)이라는 구절은 눅 17:9에서 '사례하다'(즉, 감사하다)로 번역된 것과 같은 구절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은혜를 받자'는 말은, '감사하자'는 말과 같다는 것이다(실재로 NIV, NASB, NLT등 대부분의 현대 번역본들은 이 구절을 '감사하자'는 의미로 번역한다). 성경은 감사에 대해 많은 강조를 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감사는 우리가 은혜를 받을 때만 가능하다. 은혜는 받지 않고, 율법적으로 감사만 드리려는 것은 결국 우리를 은혜에서 더 멀어지게 만들 뿐이다.

하나님을 찾는 자,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원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것이다. 그리고 이 은혜는 우리를 결국 그분의 영광으로 인도할 것이다. 그분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 지상에서의 삶부터 영광에서 영광으로(고후 3:18) 변하여지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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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mplicity in Christ

카테고리 없음 2007. 12. 16. 23:48
하나님의 음성은 어떤 때는 매우 잔잔한 느낌으로 내게 다가오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매우 명확하고도 구체적으로 갈 길을 보이죠. 이렇게 명확하게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는 거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얼마전, 내게 꼭 필요하지도 않은데 남들이 다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어느 전자 장비에 대해 관심이 생겨서 '나도 돈 생기면 이런 거 하나 사볼까' 생각하고 있을 때, 그 명확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Simplicity in Christ!'
 
하나님이 영어로 말씀하신 흔치 않은 경우였죠. 어쨌든 그 말씀은 최근 나의 삶의 어떤 부분이 잘못되어있는지를 매우 정확하게 지적하였습니다. 즉, 세상의 풍속을 좇아 지나치게 물질적인 풍요에 관심을 기울이며 바쁘고 정신 없이 살아가기에, 그리스도만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징인 'simplicity' (단순성)을 상실했다는 지적이었습니다.
 
이런 죄는 살인이나 도둑질처럼 명확하게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할찌라도, 다른 죄와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싸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죄악을 조금씩 허용하다보면 결국 인생이 세상의 것들로 가득차게 되고, 하나님만 사랑하는 삶을 살지 못하게 될 테니까요.
 
성경을 찾아보니 'simplicity in Christ'라는 표현이 정말 나오더군요.
 
2Cr 11:3 But I fear, lest by any means, as the serpent beguiled Eve through his subtilty, so your minds should be corrupted from the simplicity that is in Christ.
 
고후 11:3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simplicity)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바울은 고린도의 신자들이 유혹을 받아 simplicity를 잃게 될까봐 염려했습니다. 바로 저의 상황이 고린도 교인들과 같았고, 하나님은 신실하게도 제게 직접 말씀하심으로 제가 더 죄에 빠지기 전에 저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신 것이지요.
 
신실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내가 잘못된 길로 다닐때, 내게 깨달음의 말씀을 주시는 주님이 계시기에 긴 인생의 길 가운데 낙망하지 않고 걸어갈 수 있음을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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