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감정

카테고리 없음 2007. 12. 20. 19:14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보낸 첫번째 편지를 매우 과격한 말로 마무리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고전 16:22)


여기서 "저주를 받을찌어다"로 번역된 말은 단지 "벌을 받을찌어다" 또는 "안 좋은 일을 당할찌어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부터 버려저서 구원의 소망이 없이 지옥에 던져지리라는 뜻입니다. 즉,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구원되지 못한다는 말이지요. 이는 "예수를 믿기만 하면 천국에 간다"는 말이 성경의 가르침과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예수를 믿을 뿐 아니라 예수를 사랑하는 자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고, 진정으로 천국에 갈 수 있는 자이지요.

바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특권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바 되었느니라 (고전 8:3)
이 구절을 쉽게 번역하자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도 그를 아신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그를 모르시겠죠. 예수님은 마지막 심판 날에 자신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 내며, 많은 권능을 행한 사람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며 쫓아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쫓아내신 이유는 그들을 알지 못하시기 때문이고, 예수님이 그들을 알지 못하신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을 사랑해야 할까요? 우리는 교회에서 늘 "사랑은 감정이 아니다, 결단이다"는 말을 듣습니다. 하지만 저는 "사랑은 감정이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여기 서로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넘치는 부부가 있고, 서로에 대한 사랑의 감정은 없지만 사랑하기로 결단한 부부가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어느 쪽이 더 올바른 부부의 모습일까요? 여기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넘치는 그리스도인이 있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은 없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기로 결정한 그리스도인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어느쪽이 더 하나님을 사랑하는 올바른 모습일까요? 사랑하기로 결정한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보다 더 낮은 수준일 수 밖에 없습니다.

현대인이 "사랑"을 하지 않고 "사랑하기로 결정"만 하는 까닭은 현대인의 감정상태가 정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은 거대한 두뇌, 과발육한 욕정, 그리고 매마른 감정을 가진 존재입니다. 따라서 현대인이 가장 믿지 못하는 것이 바로 감정입니다. 현대인에게 감정은 우울, 혼동, 불안정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죠.

하지만 사랑이 사랑이기 위해선 감정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랑의 감정을 우리에게 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갈 4:6)

이 구절은 그리스도인의 신분 (하나님의 아들)으로 부터 시작해서, 이러한 신분에 맞는 감정 (아들의 영), 그리고 이러한 감정에서 흘러나오는 행동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름)까지 보여줍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이 신분에 맞는 감정이 들지 않음으로 감정을 결단이라는 의지로 대체하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감정이 없이 결단에 의존한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고, 따라서 이러한 사랑을 추구하는 사람은 쉽게 지쳐버릴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속에 사랑의 감정을 부어주시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감정을 억누르고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진정으로 우리와 사랑의 감정을 나누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고 성령이 주시는 감정에 자신을 맏길 때, 우리는 하나님과 새로운 수준의 친밀감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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