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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방 사역자

카테고리 없음 2008. 2. 24. 12:41
우리는 그를 통하여 은혜를 입어 사도의 직분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 이름을 전하여 모든 민족이 믿고 순종하게 하려는 것입니다(롬 1:5 표준새변역개정판).

한국에서 안식년을 보내면서, 늘 존재했지만 경험할 기회가 별로 없었던 한가지 문제를 자주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선교사로서의 정체성에 관한 것인데, 쉽게 말해 내가 선교사인가? 하는 질문에 어떤 답을 해야될지 애매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선교사인지를 결정하려면, 우선 선교사의 개념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이를 위해선 선교가 무엇인지 정의를 내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람들이 생각하는 선교와 선교사에 대한 개념을 정리하다 보니까 생각했던 것 보다 상황이 훨씬 더 복잡하다는 것이 명확해지더군요.

윌리엄 캐리가 근대 선교를 시작한 이후로 유럽은 선교사를 보내는 나라고, 아프리카, 인도, 중국은 선교사가 필요한 나라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국가에 가기 위해 배를 타면 짧아도 몇주, 길면 몇 달이 걸렸기 때문에, 선교사로 간다는 것은 거의 평생 현지에서 선교사로 산다는 뜻이었고, 실제로 많은 선교사가 선교지에 묻혔습니다. 이러한 시절에는 선교사의 정의를 내리기가 매우 쉬웠습니다. 즉, 선교사는 유럽, 또는 미국을 떠나 아시아나 아프리카로 가서, 여러해 동안 현지에 머물며 현지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20세기가 되면 이러한 선교사에 대한 정의가 대단히 흔들리게 됩니다. 우선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복음이 전해지면서 이러한 지역 교회가 파송한 선교사가 늘어났습니다. 이와 함께, 미국과 유럽이 복음에서 떠나면서 서양도 선교사를 보낼 뿐 아니라 선교사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서양 선교사가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전도하는 것이 선교'라는 개념은 완전히 쓸모없는 것이 되어 버리고, 이를 대체할 새로운 개념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온 개념이 '선교는 타문화 사역'이라는 개념입니다. 하지만 타문화 대상 사역이라고 해도, 어떤 한국 분이 안산공단에서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사역하는 경우 보통 그런 분을 선교사로 인식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외국에 가서 타문화권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것이 선교'라는 정의가 가능하겠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정의도 완벽한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전도가 선교의 궁극적 목적이라면, 전도가 아닌 다른 사역을 하는 사람들의 경우는 어떨까요? 예를 들어, 어떤 분들은 사무실 행정을 보고, 어떤 분들은 시설을 관리 합니다. 어떤 분들은 전도는 안하고 고아와 과부들을 돌보기도 하고, 어떤 분들은 우물을 파서 물문제를 해결하기도 합니다. 이런 일들은 전도는 아닌데, 이런 일을 하는 분들도 선교사입니까? 아니면 이런 일은 전도가 아니니까 선교사가 아니라고 해야 합니까?

또 한가지 문제는, 외국에서 타문화권에서 전도를 한다고 해도, 미국이나 호주, 유럽에 가있는 선교사를 선교사로 인정할까 하는 문제입니다. 많은 사람이 미국이나 캐나다, 호주 같은 살기 좋은 나라에서 사역하는 것은 선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선교학계에서 선교지를 경제수준에 따라 구분하는 일은 없지만, 일반인에게 선교지란 곧 가난한 지역이고, 따라서 복음화율이 아무리 낮아도 경제수준이 높다면 선교지가 필요 없는 땅이라고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어쩌면 18세기 유럽 식민지 시대의 선교 모델과 가장 비슷하고, 따라서 지금도 가장 설득력 있는 개념은 바로 10/40 창일 것입니다. 10/40창 지역은 대체로 가난하고, 대체로 복음을 전하는데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다는데서 과거의 위대한 선교사들이 어려움을 뚫고 선교를 했던 모습에 가장 근접하다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이러한 10/40창을 이용한 정의도 꼭 현실에 적합한 것많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10/40창에서 선교하는 사람만 선교사라면, 남미 선교사는 다 선교사가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아프리카 선교사도(남아공에서 케냐까지) 10/40창 선교사는 아닙니다. 만약 10/40 창 안에 선교하는 분만 선교사라면 그런 분들은 갑자기 선교사 지위를 박탈당하는 황당함을 경험해야겠죠. 그와 함께 질문하게 되는 것은, '왜 우리는 18세기 선교사의 개념을 세상이 변한 21세기에 적용하려 하는가?' 입니다. 뭔가 우리 실정에 맞는 선교사의 개념을 찾으면 안될까요?

만약 10/40창 지역의 선교사를 올바른 선교사의 모델의 척도로 삼는다 하여도, 그분들의 상황은 18세기의 선교시대와는 매우 다릅니다. 우선, 항공여행의 발달로 어느 나라나 24시간 내에 갈 수 있는 상황에서, 선교사들도 원한다면 자국으로 몇번씩 왔다 갔다 할 수 있게 되었고, 실제로 많은 분들이 본국과 선교지를 자주 오갑니다. 그러는 것이 사역에 더 도움이 될 경우도 많죠. 그리고 부유한 선교사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개념도, 남미 출신의 가난한 선교사가 일본에 와서 사역하는 경우에는 적용할 수 없죠.

오늘날 선교사의 정의를 어렵게 하는 또다른 요인은, 단기 선교의 확산입니다. 앞서 말한 항공 교통의 발달로 선교지를 오가는 일이 자유로워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단기간 선교 여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런 단기 팀의 구성원까지 선교사라고 부르지는 않지만, 이렇게 단기 여행을 하고 난 후, 현지에 대한 마음을 사고 현지로 돌아가 2-3년 정도 사역하는 경우는 많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선교사는 최소 20-30년을 하는 사람이었는데, 오늘날의 선교사는 현지 경험이 2-3년밖에 없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지요. 심지어 '비거주 선교사(non-residential missionary)'는 현지에서 매우 짧은 경험만 있어도, 그 이후 본국에서 현지를 위해 일하고 선교사로 인정이 되는 것이지요.

게다가, 선교가 대중화 되면서, 선교사의 개념조차 민주화가 되어서, 이제는 가는 사람이 선교사일 뿐 아니라, '보내는 선교사'도 인정이 됩니다. 그리고 선교 동원가도 많은 경우 선교사로 인정이 됩니다. 몇몇 유명한 교계 지도자는 거주지가 한국인데도, 가끔씩 해외에서 사역을 한다는 이유로 '선교사'라는 직함을 쓰더군요. 그에 비해 교계 지도자가 아니면 그러한 "선교사"와 동일한 사역을 해도 선교사라는 명칭을 쓰지 못하더군요.

그렇다면 선교사는 무엇일까요? 선교사(missionary)는 선교(mission)를 하는 사람이겠지요. 영어의 mission이라는 말은 라틴어의 missio에서 왔고, 이는 곧 동사 mittere(보내다)에서 왔습니다. 그래서 mission은 어원을 따졌을 때, '보냄'이랄 수 있겠고, missionary는 '보내진 사람'이랄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리스어로 사도를 뜻하는 apostolos라는 단어도 '보내다'에서 온 말이고, 따라서 사도는 '보내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고 보면 선교사라는 단어는 사도라는 단어와 가장 가깝다고 말해도 되겠습니다.

사실 성경에는 선교사는 없고 사도만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에 나오는 다섯가지 직임에도 선교사는 들어가지 않습니다. 앞서 말했듯,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선교사'의 개념은 성경적인 개념이 아니라 18세기 유럽의 특수 상황이 만들어낸 산물입니다.

그렇다면 선교의 성경적 기초는 무엇일까요? 성경은 하나님이 열방을 향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수차례 언급합니다. 창세기에 인간을 창조하시며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던 것이나, 아브라함에게 '너를 통해 모든 민족이 복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이나, 시편2편에서 '구하라 열방을 네 유업으로 주리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나 모두 이러한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의 표현입니다. 열방은 하나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그러나 천년의 기간 동안 복음은 유럽에 같혀 전혀 유럽 밖으로 전파되기 못하였습니다. 윌리엄 캐리와 함께 시작된 근대 개신교 선교는 이러한 하나님의 열방을 향한 마음의 표현의 시작이었습니다. 그 이후로도 하나님은 계속적으로 열방을 자신의 뜻대로 바꾸기 위하여 믿는자들을 통하여 역사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열방이 하나님께 돌아와야 하지만, 이는 전도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나라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요, 각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성품이 반영되는 것입니다. 전도는 그것을 위한 시작점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어느 사회가 복음을 모르면 그 사회가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고 하나님께 기쁨과 영광을 드리는 일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선교란 단지 전도가 아닌, 전도와 사회를 하나님이 보시기에 기쁨이 되는 장소로 바꾸어 놓는 일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요즘 YWAM에서 많이 노력하고 있는 지역사회 개발이나 식수 개발 사역도 선교에 포함될 수 있다고 봅니다. 고아원이나 학교도 마찬가지구요. 심지어는 로렌 커닝햄의 아들 데이비드 커닝햄이 헐리웃에서 감독으로 일하면서 하나님을 위해 영화계를 바꿔놓는 일을 한다고 할 때, 그도 어떤 선교사 만큼이나 하나님이 보내신 일을 감당하는 자라고 볼 수 있겠죠.

바울은 로마서 1장 5절에서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모든 민족이 그 이름을 믿고 순종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모든 선교사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봅니다. 모든 민족이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것, 그것이야 말로 성경이 말하는 선교이고,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선교사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선교사라는 명칭을 여전히 18세기 기준에 맞춰 사용하는 형편이고 보면, 저를 포함한 열방에서 주님의 뜻이 이뤄지도록 사역하고 있는 사람들을 일컬을 다른 명칭을 찾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래서 '열방 사역자', 또는 우리 말을 넣어서 '열방 일꾼'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바울이야말로 최초, 최고의 열방 사역자 아니겠습니까? 근대에는 윌리엄 캐리나 허드슨 테일러도 열방 사역자였고, 오늘날 열방에서 주의 일을 하는 분들도 다 열방 사역자일 것입니다.

시대에 맞게 열방을 주께 돌아와 주님을 믿으며 주께 순종하게 하는 일, 그것이 바로 열방 사역자, 열방 일꾼들의 할 일이고,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큰 기쁨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열방 사역자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주를 위해 일할 것을 다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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