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성의 회복

카테고리 없음 2007. 12. 14. 16:52
얼마전 신문에서 산에 풀어줬던 곰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환경부에서는 반달곰 새끼를 동물원에서 기르다가 어느 정도 자라서 산에 풀어줬다고 합니다. 그런데 산에서 자기 능력으로 살아가야 할 곰이 동물원에서 인간과 친하게 지내던 기억을 떨처 버리지 못하고 민가로 내려와 양봉 꿀을 퍼먹는 등 민가에 피해를 많이 입혀서 주민 항의로 할 수 없이 곰을 다시 동물원으로 데리고 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동물원 측은 러시아에서 다른 곰 새끼를 들여와 키웠는데, 지난 번의 실패를 거울삼아 동물이 인간에게 정을 붙이지 않게 하려고 먹이를 줄 때도 곰 복장을 입고 주는 등, 최대한 자연 상태로 키워서 풀어줬고, 그 결과 동면을 하는 등 정상적인 곰의 행태를 보여 정착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인간이 동물을 키우면 동물이 야성을 잃고 인간에게 길들어지는 것이 정상입니다. 관광객들이 키우는 공원의 비둘기로부터 애완용 도마뱀까지, 인간과 같이 사는 동물들은 자연 상태의 동물과는 다르게 행동하고 반응합니다. 야생 동물들도 그런 차이를 아는지, 자연 상태에선 자기가 먹을 동물 한 마리만 죽이고 말 여우가, 닭장에 들어가면 닭장 속 닭들을 모두 죽여버린답니다. 야성이 없는 닭의 모습이 여우를 자극하기 때문이겠죠.

동물이 인간에게 길들어 가듯, 인간도 인간에게 길드는 법입니다. 인간은 모두 자기가 사는 지역, 친지, 가족에게 길들어 삽니다. 그리고 이렇게 길들지 않고 사는 사람은 길들어 사는 사람의 멸시를 받죠. 정처없이 떠도는 유목민은 정착 생활을 하는 농경민의 멸시를 받고, 집없이 돌아다니는 사람은 '떠돌이'로 낙인 찍힐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에겐 유랑에 대한 거대한 갈망과 함께 거대한 두려움을 느끼죠.

유럽으로 오기 전 공항에 있는 은행에서 일을 보는데, 그곳 여 직원이 내게 어디로 가고 얼마나 있다 오는지를 물었습니다. 유럽에서 몇 달 있다 온다고 답했더니, 들릴듯 말듯 반쯤 혼자말로, "아, 나도 유럽에 여행 가고 싶은데... 시간이 없어서..." 하더군요. 이 직원이 매일 수 백대의 비행기가 떠나는 공항에서 일하면서도 여행을 떠나지 못하고 여행을 떠나는 사람을 동경만 하는 까닭은 자신의 환경에 길들어졌기 때문이겠죠다. 안정된 직장에서 잘 아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사람이 뭣하러 잘 모르는 나라에 가겠습니까? 혹시 간다고 해도 많은 관광객 처럼 안정된 상황(좋은 숙소, 믿을 수 있는 가이드)만 추구하다 오겠지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 인류 구속의 새 장을 쓰기 원하실 때, 그분은 아브라함에게 '아비, 본토, 친척 집을 떠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당시는 아브람)은 본토는 떠났지만, 아비와 친척은 떠나지 못하고 같이 여행을 시작합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에 가던 도중, 하란이라는 도시에서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죽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서 가서 정착하는 과정에서 아브라함과 롯이 결별합니다. 그러고 나서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약속의 땅을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처음에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아비, 본토, 친척 집을 떠나고 나서야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던 것이지요.

우리는 '아브라함은 바보같이 왜 처음부터 다 떨치고 약속의 땅으로 용감하게 혼자 나가지 않았나? 왜 수십년을 아버지와 친척과 동행함으로 허비했을까?'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인간에게 길들은 인간은 인간을 떠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당시 세계 최고의 문명국 갈대아 출신의 아브라함으로선, 후진국 가나안 땅으로 혼자 떠나기가 지극히 어렵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언어도, 문화도 다른 민족 사이에서 살아갈 생각을 하니, 아무리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다 하더라도 망설여졌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아버지 데라가 말합니다. "얘야, 가나안 땅으로 가려거든 나도 같이 가야겠다. 너 혼자 그런 위험한 곳에 어떻게 보내느냐. 내가 다 알아서 할테니 너는 그냥 나만 따라 오거라."(사도행전 7:2-3을 보면 분명히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 약속의 말씀을 받았는데, 창 11:31을 보면 데라가 아브람을 데리고 갔다고 나옵니다. 약속의 말씀을 받은 아브라함이 주체가 아니라, 데라가 주체가 되서 움직인 것이죠. 처음부터 아브라함은 주체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고 조카 롯도 말합니다.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여기 있기 싫은데, 저도 좀 데려가 주세요. 아무래도 젊은 내가 같이 가야 더 든든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아브라함은 "나는 아비, 본토, 친척 집을 떠나라는 명을 받은 사람이기에 아내를 제외한다면 아무도 같이 갈 수 없습니다"라고 답해야 했겠죠. 하지만 그 상황에서 그렇게 말하기가 어디 쉬웠겠습니까?

저는 외국에 사역하러 갈 때, 사역 전이나 후에 그 나라에 더 머물도록 일정을 짭니다. 그 나라의 모습을 경험하기 원해서이죠. 제가 좋아하는 나라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제가 좋아하지 않는 나라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저도 수용의 폭이 좁은 사람이라 나하고 잘 맞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매우 받아들이길 꺼려하죠. 저는 유럽에서도 프랑스나 이태리 같은 라틴 계통의 나라는 좋아해도, 네델란드나 독일 같은 게르만 계통의 나라는 영 잘 맞지 않습니다.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사람들 생김세도 다르니까요. 그래서 이미 유럽 생활을 몇년이나 했지만, 익숙하지 않은 유럽국가에 며칠만 있어도 우울한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내가 길들어서 익숙한 국가만 돌아다닌다면, 한국에서만 사는 것과 큰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결국 야성은 잃어버리고, 내게 익숙한 환경만 찾아다니게 될 테니까요.

하나님의 부르심은 많은 경우에 자신이 익숙한 환경을 떠나야 이루어집니다. 자신이 인간적으로 의존할 어떤 것도 없을 때, 하나님의 능력은 역사합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아브라함이 꼭 아비와 친척까지 떠날 이유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가 아비와 친척을 떠나고 나서야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가 더 이상 인간에게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를 쓰신 것이지요.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한다면, 늘 포기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자라온 환경, 내가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포기하기는 정말 쉽지 않고, 그렇게 될 때까지 수십년이 걸릴 수도 있지만, 그럴 때에만 우리는 태초부터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계획이 온전히 이루어짐을 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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