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붕의 시대

카테고리 없음 2012. 12. 21. 03:16

올해 최고의 유행어는 멘붕이라는데 이견이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멘탈 붕괴"(mental breakdown)라는 표현의 준말인 멘붕은 다양한 신문 기사에 언급되었을 뿐 아니라 개그 콘서트에 "멘붕 스쿨"이라는 코너가 생겼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멘붕이라는 말은 매우 부드러운 소리(ㅁ, ㄴ, ㅇ 은 매우 부드럽고, ㅂ도 그리 거칠지 않습니다)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발음하기가 쉽고, 멘탈이라는 영어와 붕괴라는 한자어가 이질적인 요소를 극복하고 함께 섞였다는 점에서 코믹한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멘붕이 유행한 진정한 이유는 이 말이 우리가 사는 시대를 잘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영어의 mentality의 근원이 되는 불어의 망탈리테 (mentalité)는 한 집단의 사고방식, 세계관, 태도 등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이러한 망탈리테는 시대에 따라 변하고, 갑자기 망탈리테가 바뀌는 순간, 기존의 망탈리티를 소유한 사람은 자신이 믿던 세계관이 무너지는 경험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멘탈 붕괴, 즉 멘붕인 것이죠. 예를 들어, 코페르니쿠스 이후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 중심으로 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멘붕에 빠졌습니다. 프랑스에 혁명이 일어나 국민이 왕을 처형하는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은 멘붕에 빠졌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소련이 해체되는 모습을 보며 많은 공산주의자는 멘붕을 경험했습니다. 멘붕은 역사가 진보할 때 뿐 아니라 역사가 후퇴할때도 발생합니다. 1차대전 후 독일에 나치정권이 들어서면서 어렵게 이뤄낸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많은 독일인은 멘붕에 빠졌습니다.

지난달에 치뤄진 미국 대선도 많은 이들에게 멘붕을 안겨줬습니다. 미국인 중 "미국은 보수적 백인이 주도하는 나라고, 흑인은 사회에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존재일 뿐이다"라고 믿는 사람에게 흑인 대통령의 재선은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입니다. 그에 비해 "흑인은 백인에게 많은 핍박을 받았지만, 지금은 백인과 완전히 평등한 존재다"라고 믿는 사람에겐 오바마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현실이 받아들이기 힘들겠죠. 이처럼 두가지 세계관이 치열하게 대치하는 상황에서 치뤄지는 대선은 늘 한쪽에 멘붕을 안겨주기 마련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었을 때 "김대중은 빨갱이"라고 굳게 믿고 살아온 사람은 멘붕에 빠졌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되었을 때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민주주의가 후퇴한다"라고 믿던 사람은 멘붕에 빠졌습니다. 이번 대선은 "좌파 빨갱이에게 권력을 내줄 수 없다"라는 주장과 "박정희의 독재시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주장이 맞섰고, 양쪽 모두 물러설 수 없는 한판 승부를 벌였습니다. 결국 결과를 보며 한쪽은 멘붕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실제로도 많은 분이 멘붕에 빠졌습니다.

이러한 집단적인 멘붕의 시대는 곧 이론이 발전하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멘붕이 온 사람은 현실을 이해하고 이에 맞는 세계관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고, 이는 곧 중요한 이론적 발전으로 이어지죠. 프랑스 대혁명을 보며 멘붕에 빠졌던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는 혁명의 이념을 비판하는 "프랑스 혁명에 대한 고찰"을 썼고, 이는 곧 정치적 보수주의의 기초를 제공하는 책으로 자리잡습니다. 영국에서 시작한 자본주의가 독일로 옮겨오던 시기에 살던 칼 마르크스는 경제가 발전할수록 노동자가 가난해지는 모습을 보며 멘붕에 빠졌고, 결국 그의 자본주의 비판은 공산주의의 탄생으로 이어집니다. 20세기 들어 기존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물리 현상(예를 들어 자외선 파탄) 때문에 많은 과학자는 멘붕에 빠졌고, 이는 결국 양자역학의 탄생으로 이어집니다. 지금 대통령 선거 결과를 보며 멘붕에 빠진 사람들은 많은 글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이는 기존의 망탈리티와 맞지 않는 현실에 직면했을 때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반응입니다. 이러한 고민과 성찰은 언젠가 미래를 바꾸는 열매를 맺기 마련입니다.

이스라엘과 유다가 강대국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게 되었을 때 많은 사람은 멘붕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나라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쉽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수많은 선지자가 등장해서 새로운 수준에서 하나님의 뜻을 가르쳤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이 붙드시는 하나님의 종"(사 42:1)에 대해 예언했는데, 이는 곧 메시아에 대한 기대로 이어졌습니다. 예루살렘이 함락당한 모습을 보며 낙심했던 예레미아는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애 3:22)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의 함락은 슬픈 일이지만, 그럼에도 살아남은 자가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긍휼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처럼 멘붕의 시대는 곧 하나님을 깊이 알게 되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멘붕은 고통스러운 경험이지만, 현실을 바꾸는 생각이 탄생하는 계기이기도 합니다. 부디 이번 기회가 낭비되지 않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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