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에 해당되는 글 50건

  1. 2008.02.24 열방 사역자 1
  2. 2008.02.17 바벨탑을 쌓는 죄
  3. 2008.02.10 착한 행실
  4. 2008.02.06 하늘 나라에 사는 삶
  5. 2008.02.02 즐거움
  6. 2008.01.29 행복의 추구
  7. 2008.01.24 감사하라!
  8. 2008.01.21 기도하라!
  9. 2008.01.15 기뻐하라!
  10. 2008.01.11 하나님의 뜻

열방 사역자

카테고리 없음 2008. 2. 24. 12:41
우리는 그를 통하여 은혜를 입어 사도의 직분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 이름을 전하여 모든 민족이 믿고 순종하게 하려는 것입니다(롬 1:5 표준새변역개정판).

한국에서 안식년을 보내면서, 늘 존재했지만 경험할 기회가 별로 없었던 한가지 문제를 자주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선교사로서의 정체성에 관한 것인데, 쉽게 말해 내가 선교사인가? 하는 질문에 어떤 답을 해야될지 애매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선교사인지를 결정하려면, 우선 선교사의 개념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이를 위해선 선교가 무엇인지 정의를 내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람들이 생각하는 선교와 선교사에 대한 개념을 정리하다 보니까 생각했던 것 보다 상황이 훨씬 더 복잡하다는 것이 명확해지더군요.

윌리엄 캐리가 근대 선교를 시작한 이후로 유럽은 선교사를 보내는 나라고, 아프리카, 인도, 중국은 선교사가 필요한 나라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국가에 가기 위해 배를 타면 짧아도 몇주, 길면 몇 달이 걸렸기 때문에, 선교사로 간다는 것은 거의 평생 현지에서 선교사로 산다는 뜻이었고, 실제로 많은 선교사가 선교지에 묻혔습니다. 이러한 시절에는 선교사의 정의를 내리기가 매우 쉬웠습니다. 즉, 선교사는 유럽, 또는 미국을 떠나 아시아나 아프리카로 가서, 여러해 동안 현지에 머물며 현지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20세기가 되면 이러한 선교사에 대한 정의가 대단히 흔들리게 됩니다. 우선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복음이 전해지면서 이러한 지역 교회가 파송한 선교사가 늘어났습니다. 이와 함께, 미국과 유럽이 복음에서 떠나면서 서양도 선교사를 보낼 뿐 아니라 선교사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서양 선교사가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전도하는 것이 선교'라는 개념은 완전히 쓸모없는 것이 되어 버리고, 이를 대체할 새로운 개념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온 개념이 '선교는 타문화 사역'이라는 개념입니다. 하지만 타문화 대상 사역이라고 해도, 어떤 한국 분이 안산공단에서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사역하는 경우 보통 그런 분을 선교사로 인식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외국에 가서 타문화권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것이 선교'라는 정의가 가능하겠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정의도 완벽한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전도가 선교의 궁극적 목적이라면, 전도가 아닌 다른 사역을 하는 사람들의 경우는 어떨까요? 예를 들어, 어떤 분들은 사무실 행정을 보고, 어떤 분들은 시설을 관리 합니다. 어떤 분들은 전도는 안하고 고아와 과부들을 돌보기도 하고, 어떤 분들은 우물을 파서 물문제를 해결하기도 합니다. 이런 일들은 전도는 아닌데, 이런 일을 하는 분들도 선교사입니까? 아니면 이런 일은 전도가 아니니까 선교사가 아니라고 해야 합니까?

또 한가지 문제는, 외국에서 타문화권에서 전도를 한다고 해도, 미국이나 호주, 유럽에 가있는 선교사를 선교사로 인정할까 하는 문제입니다. 많은 사람이 미국이나 캐나다, 호주 같은 살기 좋은 나라에서 사역하는 것은 선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선교학계에서 선교지를 경제수준에 따라 구분하는 일은 없지만, 일반인에게 선교지란 곧 가난한 지역이고, 따라서 복음화율이 아무리 낮아도 경제수준이 높다면 선교지가 필요 없는 땅이라고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어쩌면 18세기 유럽 식민지 시대의 선교 모델과 가장 비슷하고, 따라서 지금도 가장 설득력 있는 개념은 바로 10/40 창일 것입니다. 10/40창 지역은 대체로 가난하고, 대체로 복음을 전하는데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다는데서 과거의 위대한 선교사들이 어려움을 뚫고 선교를 했던 모습에 가장 근접하다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이러한 10/40창을 이용한 정의도 꼭 현실에 적합한 것많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10/40창에서 선교하는 사람만 선교사라면, 남미 선교사는 다 선교사가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아프리카 선교사도(남아공에서 케냐까지) 10/40창 선교사는 아닙니다. 만약 10/40 창 안에 선교하는 분만 선교사라면 그런 분들은 갑자기 선교사 지위를 박탈당하는 황당함을 경험해야겠죠. 그와 함께 질문하게 되는 것은, '왜 우리는 18세기 선교사의 개념을 세상이 변한 21세기에 적용하려 하는가?' 입니다. 뭔가 우리 실정에 맞는 선교사의 개념을 찾으면 안될까요?

만약 10/40창 지역의 선교사를 올바른 선교사의 모델의 척도로 삼는다 하여도, 그분들의 상황은 18세기의 선교시대와는 매우 다릅니다. 우선, 항공여행의 발달로 어느 나라나 24시간 내에 갈 수 있는 상황에서, 선교사들도 원한다면 자국으로 몇번씩 왔다 갔다 할 수 있게 되었고, 실제로 많은 분들이 본국과 선교지를 자주 오갑니다. 그러는 것이 사역에 더 도움이 될 경우도 많죠. 그리고 부유한 선교사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개념도, 남미 출신의 가난한 선교사가 일본에 와서 사역하는 경우에는 적용할 수 없죠.

오늘날 선교사의 정의를 어렵게 하는 또다른 요인은, 단기 선교의 확산입니다. 앞서 말한 항공 교통의 발달로 선교지를 오가는 일이 자유로워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단기간 선교 여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런 단기 팀의 구성원까지 선교사라고 부르지는 않지만, 이렇게 단기 여행을 하고 난 후, 현지에 대한 마음을 사고 현지로 돌아가 2-3년 정도 사역하는 경우는 많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선교사는 최소 20-30년을 하는 사람이었는데, 오늘날의 선교사는 현지 경험이 2-3년밖에 없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지요. 심지어 '비거주 선교사(non-residential missionary)'는 현지에서 매우 짧은 경험만 있어도, 그 이후 본국에서 현지를 위해 일하고 선교사로 인정이 되는 것이지요.

게다가, 선교가 대중화 되면서, 선교사의 개념조차 민주화가 되어서, 이제는 가는 사람이 선교사일 뿐 아니라, '보내는 선교사'도 인정이 됩니다. 그리고 선교 동원가도 많은 경우 선교사로 인정이 됩니다. 몇몇 유명한 교계 지도자는 거주지가 한국인데도, 가끔씩 해외에서 사역을 한다는 이유로 '선교사'라는 직함을 쓰더군요. 그에 비해 교계 지도자가 아니면 그러한 "선교사"와 동일한 사역을 해도 선교사라는 명칭을 쓰지 못하더군요.

그렇다면 선교사는 무엇일까요? 선교사(missionary)는 선교(mission)를 하는 사람이겠지요. 영어의 mission이라는 말은 라틴어의 missio에서 왔고, 이는 곧 동사 mittere(보내다)에서 왔습니다. 그래서 mission은 어원을 따졌을 때, '보냄'이랄 수 있겠고, missionary는 '보내진 사람'이랄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리스어로 사도를 뜻하는 apostolos라는 단어도 '보내다'에서 온 말이고, 따라서 사도는 '보내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고 보면 선교사라는 단어는 사도라는 단어와 가장 가깝다고 말해도 되겠습니다.

사실 성경에는 선교사는 없고 사도만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에 나오는 다섯가지 직임에도 선교사는 들어가지 않습니다. 앞서 말했듯,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선교사'의 개념은 성경적인 개념이 아니라 18세기 유럽의 특수 상황이 만들어낸 산물입니다.

그렇다면 선교의 성경적 기초는 무엇일까요? 성경은 하나님이 열방을 향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수차례 언급합니다. 창세기에 인간을 창조하시며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던 것이나, 아브라함에게 '너를 통해 모든 민족이 복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이나, 시편2편에서 '구하라 열방을 네 유업으로 주리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나 모두 이러한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의 표현입니다. 열방은 하나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그러나 천년의 기간 동안 복음은 유럽에 같혀 전혀 유럽 밖으로 전파되기 못하였습니다. 윌리엄 캐리와 함께 시작된 근대 개신교 선교는 이러한 하나님의 열방을 향한 마음의 표현의 시작이었습니다. 그 이후로도 하나님은 계속적으로 열방을 자신의 뜻대로 바꾸기 위하여 믿는자들을 통하여 역사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열방이 하나님께 돌아와야 하지만, 이는 전도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나라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요, 각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성품이 반영되는 것입니다. 전도는 그것을 위한 시작점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어느 사회가 복음을 모르면 그 사회가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고 하나님께 기쁨과 영광을 드리는 일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선교란 단지 전도가 아닌, 전도와 사회를 하나님이 보시기에 기쁨이 되는 장소로 바꾸어 놓는 일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요즘 YWAM에서 많이 노력하고 있는 지역사회 개발이나 식수 개발 사역도 선교에 포함될 수 있다고 봅니다. 고아원이나 학교도 마찬가지구요. 심지어는 로렌 커닝햄의 아들 데이비드 커닝햄이 헐리웃에서 감독으로 일하면서 하나님을 위해 영화계를 바꿔놓는 일을 한다고 할 때, 그도 어떤 선교사 만큼이나 하나님이 보내신 일을 감당하는 자라고 볼 수 있겠죠.

바울은 로마서 1장 5절에서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모든 민족이 그 이름을 믿고 순종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모든 선교사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봅니다. 모든 민족이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것, 그것이야 말로 성경이 말하는 선교이고,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선교사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선교사라는 명칭을 여전히 18세기 기준에 맞춰 사용하는 형편이고 보면, 저를 포함한 열방에서 주님의 뜻이 이뤄지도록 사역하고 있는 사람들을 일컬을 다른 명칭을 찾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래서 '열방 사역자', 또는 우리 말을 넣어서 '열방 일꾼'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바울이야말로 최초, 최고의 열방 사역자 아니겠습니까? 근대에는 윌리엄 캐리나 허드슨 테일러도 열방 사역자였고, 오늘날 열방에서 주의 일을 하는 분들도 다 열방 사역자일 것입니다.

시대에 맞게 열방을 주께 돌아와 주님을 믿으며 주께 순종하게 하는 일, 그것이 바로 열방 사역자, 열방 일꾼들의 할 일이고,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큰 기쁨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열방 사역자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주를 위해 일할 것을 다짐해 봅니다.
:

바벨탑을 쌓는 죄

카테고리 없음 2008. 2. 17. 13:05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고 명령하십니다 (창 1:28). 하나님은 인류의 죄악을 홍수로 심판하신 후에도 노아와 그의 자손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창 9:1). 이 명령에 따르면 인간은 온 땅에 퍼져 황무지였던 세상을 동산으로 만드는 하나님의 청지기로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죄악에 물든 인류는 하나님의 명령 보다는 자신의 욕심을 따라 살기 원했고, 하나님의 명령에 거역하고 맙니다.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은 바로 이러한 잘못을 저지른 것이지요.

창세기 11장에는 동쪽으로 여행을 하다가 시날 평지에 다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시날 평지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으로, 훗날 메소포타문명이 꽃피는 곳입니다. 이 지역은 땅이 비옥하고 평평하며 티그리스와 유프라데스 강의 물을 농사에 쓸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이 정착하기에 매우 좋은 환경입니다.

문제는 이 지역을 발견한 사람들이 이 지역이 너무 좋은 나머지, 그 지역에 정착할 생각만 하고 "땅에 충만할" 생각을 안 한 것이지요. 즉, 아무리 시날땅이 좋고 그곳에 정착하고 싶어도, 그들의 대다수는 다른 지역으로 옮겨갔어야 하는데, 그들은 모두 시날땅에 주저 앉으려 했던 것이지요.

그들이 탑을 쌓은 이유는 그들의 자손까지도 시날땅을 떠나지 못하도록 만들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시날땅이라는 평지에 탑이 우뚝 솟으면 사방에서 이 탑을 쉽게 볼 수 있고, 탑을 중심으로 모여 살기 마련이죠. 즉, 하나님을 중심으로 삼았다면 사방으로 퍼졌을 텐데, 이들은 하나님의 뜻을 망각하고 자신과 자손이 모두 가장 살기 좋은 땅에서 천년 만년 잘먹고 잘살기만을 꿈꾸었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들의 언어를 흩으심으로 이들이 더 이상 한 곳에 모여살지 못하고 전세계로 퍼지도록 하셨죠. 하나님의 뜻을 어기려던 이들의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만 것입 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기를 삶의 가장 우선순위로 정해야 하죠. 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는 자신의 편안과 행복을 삶의 중심에 놓고 삽니다. 이러한 태도는 결국 우리에게 슬픔과 좌절만을 안겨줍니다.

아무리 욕심 나는 일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멈추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바벨탑을 쌓는 죄를 피하는 비결입니다.
:

착한 행실

카테고리 없음 2008. 2. 10. 12:37
장인이 제품을 만들 때, 그는 이 제품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생각하며 만들 것입니다. 망치는 못을 박기 위한 것이고, 종이는 그 위에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기 위한 것이고, 벽돌은 건물을 짓기 위한 것이지요.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셨을 때도 이러한 계획을 가지고 만드셨습니다. 창세기 1장에 나온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으로 하여금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창 1:26).

하지만 인간은 타락했고, 하나님은 그리스도안에서 인간을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고후 5:17). 그가 만드신 신인류가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이지요.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 2:10)
즉, 하나님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도록 지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선한 일이란 무엇일까요? 이는 선하신 하나님의 성품에서 흘러나온 일입니다. 즉, 하나님이 선하시기에, 그분의 뜻을 따른 일은 모두 선한 일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고, 가난한 사람을 돕고, 복음을 전하고, 가정을 돌보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을 돌보는 일 등이 모두 선한 일이지요.

하나님은 우리 안에 선한 일을 시작하셨고, 이를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것입니다 (빌 1:6). 우리는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골 1:10). 하나님의 사람은 모든 선한 일에 대해 준비가 되어야 합니다 (딤후 3:17).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우리가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함입니다 (딛 2:14). 그리고 우리가 선한 일을 행할 때, 사람들은 우리의 빛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마 5:16).

지금 당신이 있는 자리에서 실천할 수 있는 선한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지금 하나님이 당신에게 행하기 원하는 일입니다.


:

하늘 나라에 사는 삶

카테고리 없음 2008. 2. 6. 23:19
성경은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창 1:1). 땅은 우리 눈에 보이는 물질의 세상이고, 하늘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상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마 6:9).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 우리도 하늘에 속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이 이 세상에서 한참 떨어진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늘에서 멀고, 우주선을 타고 한참을 날아 가야 할 수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찬송가에 나오는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라는 구절은 이러한 사고를 표현한 것이지요.

하지만 하늘은 그렇게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닙니다. 달라스 윌라드는 하나님의 모략 (Divine Conspiracy)에서 "하늘은 바로 공기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즉, 우리는 보통 공기는 하늘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공기도 하늘로 본다는 것이지요. 만약 하늘 나라가 저 먼 우주 바깥에 있지 않다면, 우리는 바로 지금 하늘 나라에 살고 있는 셈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늘은 물질 세상 속에 숨은 영의 세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땅위에 살 뿐만 아니라 하늘에 속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 생활 가운데 하늘 나라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리의 태도는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가 물질 세계에 집중을 하고 산다면, 우리는 물질 세계만 인식하겠지만, 하늘 나라에 집중한다면, 우리는 하늘 나라를 일상에서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로렌스 형제가 쓴 "하나님의 임재 연습"은 바로 이러한 개념을 담은 책입니다. 그에겐 일상의 삶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였고, 따라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기 위해 노력을 하며 살았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과 동일하게 살아간다는 사실은 무척 슬픕니다. 우리는 땅에 살 뿐 아니라, 땅 위에서 하늘 나라를 위해 하늘 나라를 경험하며 살도록 부르심 받았습니다. 하늘 나라를 멀지 않습니다. 매 순간의 삶에서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신이 있는 이곳이 바로 하늘 나라임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러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

즐거움

카테고리 없음 2008. 2. 2. 22:17
많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은 즐거움을 누리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신앙생활은 의무의 연속이고, 하기 싫은 일을 참고 하는 삶을 뜻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죠.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엔 즐거움이 가득해야 정상입니다. 물론 이 기쁨은 세상의 방탕한 즐거움과는 다릅니다. 세상의 즐거움은 타락한 육체의 본성을 따를 때 오지만, 그리스도인의 즐거움은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 옵니다.

영화 "불의 전차"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은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자 국가대표 육상선수입니다. 그는 극중에서 "나는 달릴 때 하나님의 기쁨 (pleasure of God)을 느낀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즐거운 마음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분은 세상을 보시며 "좋았더라"고 선언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즐거운 마음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도 세상을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음악을 들으며, 소설을 읽으며, 멋있는 석양을 보며, 그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지요. 또한 그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직업을 가질 때, 그는 자신의 직업을 통해 즐거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에 즐거운 일이 많은데도 그리스도인이 늘상 찡그린 얼굴로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우리가 지상에서 사는 동안, 우리는 하나님의 즐거움을 누리며 살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

행복의 추구

카테고리 없음 2008. 1. 29. 12:21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뜻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 1:26)


하나님은 지상에서 하나님 대신 만물을 다스릴 존재로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대리자인 것이지요. 따라서 모든 인간은 원래 하나님의 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타락한 후, 인간은 하나님의 종의 자리에 있길 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 자신의 뜻을 따라 살기 원했기 때문이지요.

여기서부터 인간의 비극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실천하는 삶을 목표로 삼아야 할 인간들이,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자신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을 때, 인간에게 돌아온 것은 공허와 좌절 뿐이었습니다.

세상은 "행복"을 미끼로 인간을 유혹합니다. "네가 이렇게 살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하지만 세상에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몇명이나 될까요? 세상이 말하는 대로 돈이 많고, 유명하고, 권력이 많은 사람은 매일매일이 즐겁겠습니까? 그렇다면 왜 돈도 많고 사랑도 많이 받는 연예인들은 결국 불행에 찌든 모습을 드러내 팬들을 실망시킬까요?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도록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지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노력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이것이 인생의 의미입니다.

세상이 각박해지고, 살기 힘들어질수록 인간은 더욱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행복을 위해서는 많은 잘못을 저질러도 괜찮다는 공감대가 점차 커집니다. 하지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행복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오직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 때 (마 6:33),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할 때 (마 6:10), 우리의 삶은 올바른 방향으로 가는 것입니다.
:

감사하라!

카테고리 없음 2008. 1. 24. 14:14
저는 사람들을 만나 하나님의 말씀에 나온 진리를 나누기 좋아합니다. 특히 여러 사람들 앞에서 강의를 통해 진리를 전달하기 좋아하죠. 하지만 제가 강의할 기회는 극히 적습니다. 특히 강사가 부족한 외국 보다, 강사가 넘처나는 한국내에서는 더 적은 느낌입니다.

처음에는 이러한 상황이 답답하기도 했고, 왜 나는 강사로 인정받지 못할까를 고민해 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강의를 할 기회가 적었던 것은 나름대로 내게 축복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강의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다른 길을 찾았고, 그 결과가 블로그 운영이었습니다. 작년 10월말에 세상을 바꾸는 블로그를 공개했는데, 2개월의 활동만으로 올블로그 탑 100 블로그에 선정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블로거뉴스의 베스트 블로그 기자에 뽑히기도 했죠. 앞으로도 블로그 운영을 열심히 한다면 강의를 통해 사람을 만나는 것 보다 훨씬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생각해 본다면 저는 옛날 부터 새로운 형식의 사역을 하기 원하는 마음이 강했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에서 썼듯, 시대가 변하면 사역의 형식도 변해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었죠. 그런데 강의는 새로운 형식은 아닙니다. 제가 만약 강사로 인정받는 사람이었다면, 옛 형식에 안주하고 말았겠죠. 그러고 본다면 강사로 인정되지 않은 것은 정말 "blessing in disguise" (변장한 축복)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삶의 많은 어려움은 사실 우리를 돕는 귀중한 보배와 같습니다. 우리는 먼 미래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눈앞의 어려움을 보며 괴로워합니다. 하지만 멀게 볼 때, 우리의 삶은 감사할 조건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범사에 감사하는 삶이야 말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살전 5:18). 우리는 많은 상황에서 감사하기 보다는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한다면, 우리는 참으로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감사할 때, 우리는 어려움의 의미를 발견하고 더욱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

기도하라!

카테고리 없음 2008. 1. 21. 23:43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실 때 흙으로 빚으시고 생기를 불어 넣으셨습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흙이라는 요소와 생기라는 요소를 갖춘 특별한 존재였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인간은 영의 세계와 물질의 세계에 동시에 속하지요.

인간은 삶의 대부분을 물질 세계에서 삽니다. 하지만 인간이 기도할 때, 그는 영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그가 하는 기도는 영의 세계에 머물지 않고, 물질 세계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따라서 인간은 기도를 통해 영의 세계와 물질 세계를 연결합니다.

인간의 기도는 이처럼 우주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따라서 성경은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반복해서 가르칩니다 (마 6:5-13, 마 24:20, 눅 22:40, 고전 14:13, 엡 6:18, 살전 5:17, 살후 3:1, 딤전 2:8, 약 5:13-16).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성경은 "늘 기도하라"고도 명령한다는 점입니다 (엡 6:18, 살전 5:17).

우리는 보통 하루에 한 번 기도하기도 힘들다고 느끼는데, 성경은 "늘 기도하라"고 가르치니, 우리의 삶과 성경의 가르침은 너무나도 거리가 먼 듯 합니다. 하지만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를 위한 말씀이니, 어떻게든 우리의 삶에 적용할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우선, 우리는 늘 기도하지는 못한다 할찌라도 늘 기도의 태도를 가질 수 있습니다. 즉 마음 속으로 하나님께 집중하고, 성령이 하시는 말씀에 민감하다면, 그 자체가 우리에게 기도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나님께 대적하는 정신으로 가득하기에, 그러한 세상 속에서 기도의 태도를 취하기가 매우 힘들기 때문이죠. 따라서 우리는 의식적으로 조금씩이라도 마음속으로 기도하는 습관을 개발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하루를 살아가며, 1분이든 2분이든, 시간 날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습관을 키울 수 있습니다. 이는 단지 기도의 태도가 아니라, 다른 일을 멈추고 기도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도 영적인 저항 때문에 쉬운 일은 아닙니다만, 늘 기도하는 하나의 방법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루에 정해놓은 시간에 정해놓은 장소에서 기도하기를 쉬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도 "쉬지말고 기도함"의 한 실천이겠죠.

중요한 것은 일상의 삶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놓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임재를 쉽게 느끼지만, 직장이나 학교에서는 하나님이 멀게 느껴지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이는 그만큼 우리의 삶의 현장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정신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환경에서는 단 한마디도 입을 열어 기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해 어디서나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임재안에 거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참으로 "쉬지말고 기도"한 사람들이지요. 우리도 매일, 매 순간 마다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힘쓰면 좋겠습니다.


:

기뻐하라!

카테고리 없음 2008. 1. 15. 13:52
바울이 빌립보서를 쓸 때, 그는 로마에 있는 감옥에 같힌 상태였습니다. 인권의 개념이 없는 당시의 감옥은 죄수들의 복지를 전혀 돌보지 않았고, 따라서 외부의 도움이 없이는 생존이 거의 불가능하였습니다.

바울이 감옥에 갖힌 것은 그가 복음을 열심히 전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든 교회가 나서 복음을 위해 핍박받는 바울을 도와야 마땅했죠. 특히 바울이 목숨을 걸고 개척한 수많은 교회는 바울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어려움에 처한 그를 돕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감옥에 갇힌 바울을 돕는 교회는 전혀 없었습니다 (빌 4:15). 그나마 빌립보 교회가 그를 도왔지만, 그들도 한동안 후원을 멈추었고, 빌립보서를 쓰기 직전에야 후원을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가운데 바울은 춥고 배고픈 감옥에서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요? "아, 사람들은 나를 잊었구나. 내가 힘들여 섬기던 교회들은 나를 버렸구나. 이제 나는 먹을 것도 없이, 감옥에서 굶주린채 죽어가는구나." 하고 생각하였으리라고 보기 쉽습니다.

하지만 빌립보서를 보면 그의 태도는 이러한 암울한 태도가 아니고, 기쁨의 태도였습니다. 그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가르쳤습니다 (빌 4:6). 이는 바울 자신이 감옥에서 배운 태도였죠. 그는 도움을 얻을 곳 없는 감옥 속에서 자신의 필요를 감사하는 태도로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아무것도 없지만 감사할 수 있었고, 빌립보 교회가 헌금을 보냈을 때도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던 것입니다 (빌 4:12).

그는 빌립보 교회에게 "기뻐하라"고 가르칩니다 (빌 2:18, 3:1, 4:4). 바울은 기쁨의 중요성을 배웠기에, 가장 우울한 상황에서도 기뻐하였을 뿐 아니라, 기쁨을 가르치는 자가 된 것이지요.

성경에서 기쁨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가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 (기쁨)" 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롬 14:17). 그는 또한 성령의 열매를 언급하면서, 사랑 다음으로 기쁨을 들었습니다 (갈 5:22). 예수님은 착하고 충성된 종은 주인의 기쁨에 참여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25:21). 그분은 또한 우리에게 기쁨을 주어 우리 기쁨이 충만케 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요 15:11). 베드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한다고 말했습니다 (벧전 1:8).

기쁨은 우울의 반대입니다. 우울은 무언가 일이 잘못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그에 비해 기쁨은 일이 잘 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물론 인간적으로 보면 슬픈 일도 있고, 힘든 일도 있습니다. 모든 일이 다 잘되고 있지는 않겠죠. 하지만 크게 본다면, 세상은 하나님의 뜻 안에 있고, 지금 슬픈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웃을 날이 올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울한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마지막에 웃는 분이고, 따라서 그분은 많은 슬퍼할 이유가 있음에도 기뻐하십니다. 그분이 기뻐하신다면, 우리도 기쁨의 감정을 개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말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6, 18).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항상 기뻐하도로록 노력합시다.
:

하나님의 뜻

카테고리 없음 2008. 1. 11. 17:10
사람들은 늘 "하나님의 뜻을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뜻으로 가득차 있죠.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의 뜻을 모를 수가 없습니다. 단지 우리는 우리 상황에 맞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을 모를 뿐이죠.

성경이 우리를 위한 구체적인 하나님의 뜻을 말하지 않고, 일반적인 하나님의 뜻을 많이 말하는 이유는, 그만큼 하나님의 일반적인 뜻이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즉, 우리는 "내가 처한 이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할찌 아는 것이 중요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네 삶의 일반적인 태도가 중요하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이렇게 말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6-18)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살전 4:3)

이 외에도 성경에 나온 "~하라"는 명령은 (서로 사랑하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등) 모두 하나님의 뜻이지요.

이러한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따르도록 노력해야 하는, 삶의 기준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의 축복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1)- 천국에 들어감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마 12:50)- 예수의 가족이 됨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히 10:36)- 하나님의 약속을 받음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요일 2:17)- 영원히 거함

시편기자는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고 고백했습니다 (시 40:8). 우리도 주의 뜻을 행하기를 기뻐할 때, 하나님은 성경이 약속한 모든 축복을 우리에게 허락하시고, 또한 우리가 처한 구체적인 상황을 위한 하나님의 뜻도 알게 하실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