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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12.17 새 술은 새 부대에
  2. 2007.12.17 주의 판단
  3. 2007.12.17 나는 누구인가?
  4. 2007.12.17 불의 시련
  5. 2007.12.17 서른 즈음에...(2001년에 쓴 글)
  6. 2007.12.16 Simplicity in Christ
  7. 2007.12.16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
  8. 2007.12.16 두려움
  9. 2007.12.14 아버지
  10. 2007.12.14 야성의 회복

새 술은 새 부대에

카테고리 없음 2007. 12. 17. 21:21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합하지 아니하리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것이니라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눅 5:36-39)


전에 인도에서 만난 한국인 간사와 이야기를 하다가, 대학사역이 시도 중인 새로운 모임에 대해 듣게 되었습니다. 그 간사는 이 모임이 활성화한다면 다른 곳에서는 얻을 수 없는 소중한 것을 학생들에게 제공하게 될 것을 기대한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모임 자체는 좋은 아이디어 같았지만, 한가지 문제점을 지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요즘 학생들은 1학년때부터 매우 바쁘게 산다. 그런데 기존의 모임에다가 새로운 모임을 추가한다면, 참석해야 하는 모임이 두 배로 늘어난다. 따라서 새로운 모임에 대해 관심이 있는 학생도 기존의 모임까지 나오기가 부담스러워 모임에 참석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새로운 모임을 진정으로 활성화 하려면 기존의 모임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다.' 과격하게 들릴찌 모르지만, 기존의 모든 조직을 그대로 놔두고 또 하나의 모임을 덧붙인다고 사역이 새로운 수준으로 발전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는 새술(새로운 모임)을 낡은 부대(옛조직)에 담으려는 노력일 뿐이죠. 새술을 원한다면, 과감하게 낡은 부대를 버릴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사회가 바뀌면 사역도 바뀌어야 한다는 진리를 발견한 것은 사역 현장의 경험을 통해서였습니다. 2001년 한국을 떠나면서, YWAM의 정식 파송 선교사가 될 것인가를 고민하던 중, 유럽을 선교지로 인정하지 않는 파송규정상 '선교사'가 되지 못한 채 한국을 떠났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이 새로운 사역에 오히려 도움이 되었습니다. 제가 정식 파송선교사였다면 선교지에 나간 후 몇년 간 한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1년에 얼마 이상은 한국에 머물지 못하는 등 규정 때문에 행동에 제약이 많았겠죠. 하지만 21세기의 사역 현실은 6개월 배타고 선교지로 떠나가던 19세기의 현실과는 너무 다릅니다. 이제는 교통, 통신의 발달로 인해 어디에 거주하는지가 그렇리 중요하지 않죠.

제가 지금 함께 사역하고 있는 SMC를 봐도, 2003년의 예를 들자면 John Henry는 6월에 혼자 FMI과 함께 인도네시아, 동티모르로 왔다가 돌아가 가족을 데리고 다시 홍콩, 싱가포르, 인도를 거쳐 다시 미국에 갔다가 유럽을 거쳐 인도에 가서 SUM을 인도하였습니다. 같은 기간에 John Hwang은 가족과 함께 6월부터 인도네시아, 동티모르를 거쳐 태국, 싱가포르, 미국, 에쿠아도르, 브라질, 미국을 거쳐 인도로 와서 SUM 간사로 섬겼습니다. 저도 그해 6월 이후 인도네시아, 동티모르, 한국, 싱가포르, 한국, 중국, 한국, 인도의 순으로 여행을 했습니다. 이렇게 다들 전세계를 여행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기존의 "선교사는 특정한 나라를 떠나지 말아야 한다"는 식의 규정은 지킬 수도 없고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새 포도주와 새 부대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하긴 누구나 오래된 포도주가 새 포도주보다 비싸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포도주 같은 존재였고, 예수님이 제자로 부른 자들도 새로운 포도주와 같은 자들입니다. 새 포도주는 쓰고, 떫고, 신 맛이 가시지 않은, 미숙한 술이지요. 그에 비해 오래된 포도주는 달고, 부드럽고, 향기롭습니다. 그래서 묵은 포도주에 맛을 들이면 아무도 새 포도주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예수님은 말하십니다. 사역도 다들 오래된 사역을 좋아합니다. 사역의 know-how가 쌓이고, 조직도 잘 갖추어지고, 재정도 풍부한... 그러나 예수님은 새 포도주의 끓어오르는 젊음 앞에서 낡은 가죽 부대는 터지고 말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오직 새 포도주 만큼이나 신축성 있는 새 가죽부대만이 새 포도주를 감당해 낼 수 있는 것이지요.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사역은 새로운 조직을 요구합니다. 기존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유연한 반응을 보일 수 있는 조직, 그러한 조직을 창조할 것을 꿈꿔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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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판단

카테고리 없음 2007. 12. 17. 17:39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판단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음이니이다(시119:75)

요즘 욥기를 읽고 있습니다. 특별히 고난을 겪어서 욥기가 생각난 것은 아니고, 그냥 성경을 순서대로 읽다 보니까 욥기가 나오는군요. 욥기를 읽다보니까, 고 3때 막 어려운 고비를 만난 순간, 욥기를 읽으며 새롭게 용기를 얻던 기억이 납니다. 하나님이 욥에게 인간이 얼마나 보잘것 없는 존재인가를 가르치시는 장면을 보며, '아, 대학에 붙건 떨어지건, 내가 이 일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뭐라고 불평하거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입시에 대한 부담감을 많이 내려놓을 수 있었죠.

요즘도 욥기를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혹시 나중에라도 더 나눌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욥의 고난이 웬지 남의 일 같지 않게 느껴지더군요. 그러면서 '하나님, 도대체 왜 이런 고난을 당해야 하는 겁니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뭐 '나중에 더 큰 축복을 주기 위해...' 가 정답일찌 모르겠습니다만, 아니, 세상에 자기 자식이 몰살당하고, 온몸이 피부병으로 만신창이가 되고, 부부관계가 깨지고 나서, 자식과 재산이 이전보다 두배로 는다고 좋겠습니까? 자식 둘 있는 사람이 그 둘이 죽는 것을 본 후, 네 명의 자식을 더 낳으면 두 배의 축복을 받았다고 싱글벙글할 수 있을까요?

욥의 고난은 며칠째 제 머리속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같이 사역하던 간사 한명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어떤 분이 절 위해 기도해 주시면서 말씀을 받았다고 하면서 시편 119편 75절을 읽어보라고 하였습니다. 위에 나온 구절이지요.이 구절을 읽자마자 제 고민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임을 깨달았습니다.

사실 제 머리속에서 욥의 고난이 떠나지 않은 이유는, 욥의 고난을 핑계로 제 자신의 고난에 대해 항의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차마 내 이야기는 못하고, 욥을 지적하면서, '왜 저사람이 저런 고통을 받아야 합니까?' 했던 것이지요. 하나님은 이 구절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보기에, 이건 네게 필요한 과정이야. 그러니까 네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라 할찌라도, 내가 성실한 이상 이 일을 건너뛸 수는 없다.'

하나님의 판단... 하나님께서 이 과정이 내게 필요하다고 하신다면, 그것은 정말 필요한 일이겠지요. 제가 어떻게 판단하건, 하나님의 판단이 정확하지 않을까요? 곰곰히 생각해보면, 정말 제게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나를 정금같이 단련하려는 하나님의 역사임이 분명합니다. 저는 '아, 이제 그만! 이 정도면 다 단련된거 아닌가요?' 하지만, 하나님은 '아니다, 내가 판단하기엔 아직 멀었다...' 하십니다. 제 입장에선 답답하지만, 하나님의 판단이 옳겠죠.

제 가장 큰 단점 중의 하나가 바로 끈기의 부족입니다. 무슨 일이 다 될때 끝내는 것이 아니라 끈기가 떨어질때 끝내니까 완전하지 않은 작품이 잘 나오는 것 같습니다. 옛날, 프랑스에서 DTS간사를 할 때, 어느 학생이 제 머리를 잘라줬습니다. 근데 그날 따라 머리카락이 피부를 찌르는 느낌이 어찌나 싫던지 '아, 이만하면 됐으니까 그냥 끝내자'하고 거의 도망쳐 버렸습니다. 제가 봐도 영 쥐가 물어뜯은 것 같이 이상한 헤어스타일이 되고 말았지만, 자존심때문에 그렇게 인정하지도 못하고, 그냥, '뭐 이정도면 됐쟎아' 하고 넘어갔죠.하지만 마음 속으론 '에이, 좀 더 참을걸...' 하는 후회가 들었습니다. 그리고 남들이, '너 이 머리 누가 이렇게 해놨니?' 할때마다, 자신의 참을성 없음에 대해 반성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아무리 '이제 다 됐죠?' 해도 자기가 보기에 아니면, '아직 아니다'고 말하는 정직한 이발사 같은 분이십니다. 그분은 나의 끈기 부족을 다룰 수 있는 분이죠. 이제 하나님의 판단력을 믿으며, 그분의 성실하심을 믿으며 내 인생을 다시 한 번 그분의 손길에 맡기기로 결정합니다. 그분의 시간에, 그분께서 모든 것을 아름답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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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카테고리 없음 2007. 12. 17. 14:47

다음은 Dietrich Bonhoeffer의 Who am I?라는 시입니다. 1996년 프랑스에서 간사로 일할때 이 시를 제 방 앞에 붙여놨었습니다. 결국 본회퍼가 하고 싶은 말은, 자신의 정체성은 하나님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겠죠.

Who am I

Who am I? They often tell me

I stepped from my cell’s confinement

Calmly, cheerfully, firmly,

Like a squire from his country-house.

Who am I? They often tell me

I used to speak to my warders

Freely and friendly and clearly,

As though it were mine to command.

Who am I? They also tell me

I bore the days of misfortune

Equally, smilingly, proudly,

Like one accustomed to win.


Am I then really all that which other men tell of?

Or am I only what I myself know of myself?

Restless and longing and sick, like a bird in a cage,

Struggling for breath, as though hands were

compressing my throat,

Yearning for colors, for flowers, for the voices of birds,

Thirsting for words of kindness, for neighborliness,

Tossing in expectation of great events,

Powerlessly trembling for friends at an infinite distance,

Weary and empty at praying, at thinking, at making,

Faint, and ready to say farewell to it all?


Who am I? This or the other?

Am I one person today and tomorrow another?

Am I both at once? A hypocrite before others,

And before myself a contemptibly woebegone weakling?

Or is something within me still like a beaten army,

Fleeing in disorder from victory already achieved?

Who am I? They mock me, these lonely questions of mine.

Whoever I am, Thou knowest, O God, I am Thine!


Wer bin ich?

Wer bin ich? Sie sagen mir oft,
ich träte aus meiner Zelle
gelassen und heiter und fest
wie ein Gutsherr aus seinem Schloß.

Wer bin ich? Sie sagen mir oft,
ich spräche mit meinen Bewachern
frei und freundlich und klar,
als hätte ich zu gebieten.

Wer bin ich? Sie sagen mir auch,
ich trüge die Tage des Unglücks
gleichmütig, lächelnd und stolz,
wie einer, der Siegen gewohnt ist.

Bin ich das wirklich, was andere von mir sagen?
Oder bin ich nur das, was ich selbst von mir weiß?
Unruhig, sehnsüchtig, krank, wie ein Vogel im Käfig,
ringend nach Lebensatem, als würgte mir einer die Kehle,
hungernd nach Farben, nach Blumen, nach Vogelstimmen,
dürstend nach guten Worten, nach menschlicher Nähe,
zitternd vor Zorn über Willkür und kleinlichste Kränkung,
umgetrieben vom Warten auf große Dinge,
ohnmächtig bangend um Freunde in endloser Ferne,
müde und zu leer zum Beten, zum Denken, zum Schaffen,
matt und bereit, von allem Abschied zu nehmen?

Wer bin ich? Der oder jener?
Bin ich denn heute dieser und morgen ein anderer?
Bin ich beides zugleich? Vor Menschen ein Heuchler
und vor mir selbst ein verächtlich wehleidiger Schwächling?
Oder gleicht, was in mir noch ist, dem geschlagenen Heer,
das in Unordnung weicht vor schon gewonnenem Sieg?

Wer bin ich? Einsames Fragen treibt mit mir Spott.
Wer ich auch bin, Du kennst mich, Dein bin ich, o Go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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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시련

카테고리 없음 2007. 12. 17. 12:03
What we call the beginning is often the end
And to make an end is to make a beginning.

-T.S. Eliot, Four Quartets


얼마전 시내에 있는 서점을 갔다가 영서 코너에서 반가운 책을 한권 발견했습니다. T.S. Eliot의 Four Quartets라는 시를 담은 시집인데, 이 시집 말고도 엘리엇의 시집 몇권이 더 보였습니다. 저는 원래 시집이나 시인에 대해 관심이 없는데, T.S. Eliot의 시 만큼은 제 마음에 와닿더군요. 물론 이 글을 읽는 분 대부분이, 'T.S. Eliot이 누군데?' 하시겠지만, 이 사람이 '사월은 잔인한 달...' 하는 구절을 썼다면 모두, '아하!' 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Four Quartets에 대해선 특별한 사연이 있습니다. 97년, 프랑스에서 1년간의 간사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입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사역했고, 열매도 많았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돌아왔지만, 한국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 건 1년 전 떠날 때 보다 더욱 어려워진 가정 형편과, 그로 인해 고생하시는 부모님, 그리고 그러한 현실이 싫어서 집 밖으로 맴돌며 집에 들어와서는 사사건건 부모님과 마찰을 빚는 내 자신의 모습뿐이었습니다. 어느 날은 쌓였던 울분이 폭발하면서 부모님앞에서 악을 쓰며 싸웠던 기억도 있습니다. 아마 내 인생에서 가장 낮은 지점이었을 것입니다...

끝이 없는 것 같은 가난, 끝이 없을 것 같은 가정 불화... 하루 하루의 삶이 고통이었고, 어디서도 소망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과연 왜 내 삶에 이런 고통이 일어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죠. 그리고 먼 옛날부터 계속되어온 이러한 고통이 앞으로 얼마나 계속될지를 알 수 없기에 고통을 이겨낼 자신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Eliot의 Four Quartets에 나오는 이 싯구가 기억이 나더군요.

To be redeemed from fire by fire...


불로부터 불에 의해 구원된다... 그때 제 마음속에 '지금 내가 당하는 고통은, 나를 고통으로부터 구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다'는 계시가 임했습니다. 즉, 하나님이 내게 이런 고통을 주시는 것은, 역설적으로, 내가 더 이상 고통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는 뜻입니다.

이 구절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그가 이 시를 쓰게 된 배경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미국인이었지만, 유럽의 문화를 너무 사랑해서 결국 영국에 귀화합니다. 그는 또한 하나님을 믿기로 결정하고 영국 국교회 교인이 됩니다. 그런데 그가 영국에 살고 있을 때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합니다. 나이가 너무 많아 군대에 갈 수 없었던 그는, 런던에서 감시탑에 올라가 폭격으로 불이 난 지점을 확인하는 역할을 맡게 됩니다.

저는 가끔 그 감시탑에 올라간 Eliot의 심정을 상상해 봅니다. 젊은날, 서양 문명의 영적, 지적 황폐함을 간파하고 'The Waste Land'를 썼던 그였고, 유럽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조국을 버리고 유럽 시민이 된 그였는데, 이제 그의 눈 앞에서 그가 지극히 사랑하는 유럽이 전쟁에 의해 진짜 황무지로 변해버릴 위기에 처해있는 것입니다.

경보 사이렌이 울리고, 불이 꺼집니다. 하늘을 나는 비행기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이더니 런던 곳곳에 불이 솟구쳐 오릅니다. 불, 불, 곳곳에 펑펑 소리를 내며 불기둥이 솟아오릅니다. 칠흙같은 어둠속에 피어오르는 불꽃은, 그러나 이 시인의 머리속에 예상치 못한 연상작용을 일으킵니다. 헤라클레스의 몸을 태운 불로부터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연옥의 불까지, 그의 머리는 유럽 문명을 흐르고 있는 갖가지 불의 이미지를 추적해 올라갑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이 불은 파괴하는 불일 뿐 아니라, 정결케 하는 불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타오르는 이 불이 하나님이 유럽을 정화하기 위해 보내는 불로 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 시에서 '불'이 '사랑'에서 나왔다고 말합니다 ('Who then devised the torment? Love.') 그는 이 불이 우리를 불에서 건지기 위한 불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저도 우리 가정에 그런 큰 어려움이 있었던 것은, 우리 가정을 구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음을 느낍니다.

요즘, 다시 이 구절이 생각나는 것은 단지 이 시집을 발견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다시 내 삶에 많은 고난과 좌절이 느껴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고난의 가장 끝에 닥치는 고난은, 절망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 고난이 끝날 때가 다 되었다는 신호인 것입니다. 다시 한번 사랑으로 우리에게 불을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분은 우리를 불로써, 불로부터 구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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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즈음에...(2001년에 쓴 글)

카테고리 없음 2007. 12. 17. 00:11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히 3:1)

I.
먼 옛날 중학교때 배웠던 시 중에 '서러운 서른 살'이라는 구절이 나오는 작품이 있었지요. 열 댓살 쯤 되었던 저로서는 '왜 서른 살이 서러워야 하는가'에 대해 이해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이제, 우리 나이로 서른 살을 지나 만 서른 살이 되는 해에 접어들면서 생각해 보니 서른 살이 서러운 이유에 대해 알 것 같다고 느껴집니다. 우선, 서른 살은 20대의 꿈과 낭만을 상실한 채,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나이이고,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이들이 이루어 놓은 많은 것들(가정, 재산, 지위 등)을 이루지 못하였기에 자신이 기성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위치하였음을 확인하는 나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20대의 꿈도, 40대의 현실적 성취도 가지지 못한, 중간에 낀 샌드위치 같은 나이라는 것이지요. 그렇게 본다면 서른 살이 서럽게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II.
저는 내년부터 시작될 본격적인 사역을 앞두고, 왜 예수님이 30세에 사역을 시작하셨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됩니다(눅 3:23).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지만, 동시에 인간이셨고, 인간으로서 육적, 영적 사회적 성장을 경험한 분이셨습니다(눅 1:52). 예수님은 처음부터 자신의 사역 기간이 그리 길지 않으셨음을 아셨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분이 서른 살에 사역을 시작하시기로 결정하신 것은, 서른 살이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는 때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그분 보다 두 세 살 정도 어렸을 제자들은, 3년의 훈련 기간이 끝나고 서른 즈음에 사도로서 자신들의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서른 살은 사역을 준비해온 사람이 사역을 시작하기에 가장 좋은 나이로도 보입니다. 아직 20대의 체력과 열정, 그리고 이상이 남아 있는 시기이고, 또한 많은 실수를 통해 20대의 미숙함을 벗어 버렸을 나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저의 사역이, 많은 기다림 끝에, 서른 즈음에 시작하게 된 것은 바로 이 때가 가장 하나님이 보시기에 적절한 때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III.
저는 요즘 '사도'라는 개념에 대해 많이 생각해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교회 가운데 사도의 직위를 복원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앞으로 몇 십년간, 우리는 지금까지 보아온 전례가 없는 놀라운 사도들의 출현을 보게 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저는 또한 주께서 약속하신 '늦은비'가 내릴 때가 다가왔으며, 지금 이 비가 내리고 있다고 믿습니다(슥 10:1). 오순절 다락방에 내렸던 '이른비'가 교회의 시작점이 되었듯, 이 늦은비는 교회를 완성시키게 될 것입니다 지금 이 말이 잘 이해가 안되신다 할찌라도, 몇년 내에 모든 사람이 인정할 수 있을 정도의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전세계 교회 가운데 놀랍게 펼쳐지리라고 믿습니다. 이것은 교회 역사에 가끔씩 있었던 부흥의 차원을 넘어서, 역사의 완성을 위하여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되기에 부족함 없도록 준비시키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흥분되지 않으십니까? 우리는 늘 꿈꾸던 대사명의 완수와 역사에 전례가 없었던 영적 대각성을 곧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놀라운 부흥의 한가운데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보게될 사도들은 그 숫자와 규모 면에서 초대 교회의 사도들을 훨씬 뛰어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세대'를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IV.
하나님은 제게 이러한 놀라운 때를 위해 자신을 준비할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저 또한 이러한 놀라운 부흥의 때에 해야할 일들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그러한 약속의 말씀을 믿습니다. 저는 제가 이방의 빛으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믿습니다. 현실이 어떠하든지, 다른 사람들이 절 어떻게 보던지 저는 이러한 약속을 통해서만 나 자신을 보기 원합니다. 그리고, 매일의 삶 가운데 이러한 약속의 성취를 염두에 두고 생활하기 원합니다. 그러고 보니, 서른 살이 그리 서럽게만 느껴지지는 않는군요. 하나님의 약속을 따르는 삶에 있어 서른 살은, 그리고 서른 한 살은, 또 하나의 축복된 시간이라고 믿습니다.

V.
제가 읽었던 중학교 참고서에 따르면 시인이 '서러운 서른 살'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중 하나는 이 표현이 시옷(ㅅ)을 반복함으로 청각적 효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저는 동일한 청각적 효과를 지녔지만 훨씬 진취적인 '사도적 서른 살'이라는 표현을 쓰기 원합니다. 사도적 서른 살...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 믿는 도리의 사도이신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한 나이에 저 또한 공적인 사역에 들어갑니다. 아주 작은 부분이나마 예수님을 닮을 수 있어 무척이나 기쁩니다. 이제 하나님을 향한 사랑, 자신의 사역과 사역의 대상인 사람들에 대한 전적인 헌신, 그리고 쉼 없는 경건의 삶이라는 훨씬 중요한 영역에 있어서도 예수님의 모범을 닮게되기를 바랍니다. 다가오는 새해는 이러한 소망들이 이루어지는 시간이기를 기도합니다.

저와 여러분을 통하여 그분의 나라를 이루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2001년을 보내고 2002년을 맞으며

성원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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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mplicity in Christ

카테고리 없음 2007. 12. 16. 23:48
하나님의 음성은 어떤 때는 매우 잔잔한 느낌으로 내게 다가오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매우 명확하고도 구체적으로 갈 길을 보이죠. 이렇게 명확하게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는 거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얼마전, 내게 꼭 필요하지도 않은데 남들이 다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어느 전자 장비에 대해 관심이 생겨서 '나도 돈 생기면 이런 거 하나 사볼까' 생각하고 있을 때, 그 명확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Simplicity in Christ!'
 
하나님이 영어로 말씀하신 흔치 않은 경우였죠. 어쨌든 그 말씀은 최근 나의 삶의 어떤 부분이 잘못되어있는지를 매우 정확하게 지적하였습니다. 즉, 세상의 풍속을 좇아 지나치게 물질적인 풍요에 관심을 기울이며 바쁘고 정신 없이 살아가기에, 그리스도만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징인 'simplicity' (단순성)을 상실했다는 지적이었습니다.
 
이런 죄는 살인이나 도둑질처럼 명확하게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할찌라도, 다른 죄와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싸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죄악을 조금씩 허용하다보면 결국 인생이 세상의 것들로 가득차게 되고, 하나님만 사랑하는 삶을 살지 못하게 될 테니까요.
 
성경을 찾아보니 'simplicity in Christ'라는 표현이 정말 나오더군요.
 
2Cr 11:3 But I fear, lest by any means, as the serpent beguiled Eve through his subtilty, so your minds should be corrupted from the simplicity that is in Christ.
 
고후 11:3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simplicity)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바울은 고린도의 신자들이 유혹을 받아 simplicity를 잃게 될까봐 염려했습니다. 바로 저의 상황이 고린도 교인들과 같았고, 하나님은 신실하게도 제게 직접 말씀하심으로 제가 더 죄에 빠지기 전에 저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신 것이지요.
 
신실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내가 잘못된 길로 다닐때, 내게 깨달음의 말씀을 주시는 주님이 계시기에 긴 인생의 길 가운데 낙망하지 않고 걸어갈 수 있음을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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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

카테고리 없음 2007. 12. 16. 23:3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히 10:19-22)



히브리서는 예수를 믿는 유대인 신자를 대상으로 쓴 편지입니다. 이들은 다른 유대인들로부터는 조상들의 종교를 버렸다는 이유로 핍박을 받았고, 로마 정부로 부터는 사회를 혼란케 하는 새로운 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았죠 (히 10:32-34).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환란을 매우 쉽게 피할 수도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 정부는 유대교를 특수 종교로 인정하였기에 유대교인에게 신앙의 자유를 보장해 주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이 '예수'를 강조하지 않고, "우리는 단지 조금 변형한 유대교를 믿는다"고 주장하면 유대인과 로마 정부로부터 핍박을 받을 필요가 없었죠. 따라서 이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핍박을 받을 때 마다 기독교를 유대교화하고 싶은 유혹을 느꼈을 것이니다.

실제로 많은 유대인 신자들은 점차 '그리스도인'이라기보다는 '유대교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나을 정도로 유대교의 풍습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 히브리서입니다. 이 서신에서 저자는 모세의 율법과 구약의 제사제도가 인간을 하나님께 이끌지 못하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이라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우리는 아무리 핍박을 받는다 하더라도 유대교로 돌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율법을 따르는 자는 곧 모세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입니다. 그에 비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들인 자입니다. 요한은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의 차이점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요 1:17)


처음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율법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초신자는 '하나님을 믿는 삶'을 '담배 안 피는 삶', '술 안 마시는 삶', '교회 봉사하는 삶' 등 인간의 행동 위주로 생각합니다. 이러한 생각이 지배하게 되면 결국 율법주의가 생겨나기 마련이죠.

율법주의란 율법을 중심으로 하는 삶을 뜻합니다. 율법은 '너는 해야한다(you should)'는 원리를 따릅니다. '너는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아야 한다.' '너는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 '너는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 '너는 남의 것을 탐하면 안된다.' 이러한 계명은 모두 우리의 의무를 가르치는 율법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우리가 이런 율법을 다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죠. 그러면 우리는 더더욱 열심히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그럴수록 자신이 얼마나 율법을 지킬 능력이 없음을 깨닫고 좌절합니다.

우리는 처음에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고 하나님께 나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부터 믿음이 아닌 율법에 의존해서 하나님께 나아오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는 삶은 결코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역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 (요 5:45)


오늘날의 율법을 의존해 사는 그리스도인은 옛 유대인들 처럼 모세를 '바라'며, 또는 '신뢰'하며 살아갑니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삶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열어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는 그러한 방법이 실패하면 그들은 '예수' 때문에 자신들이 어려움을 겪는다고 생각하죠.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셨듯, 그들은 예수를 비난할 것이 아니라 모세를 바라는 태도, 즉 율법적인 태도를 회개해야 합니다.

모세의 율법을 의존하는 사람은 자신의 의로움을 인정하는 것이고, 이는 실망과 좌절을 낳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율법을 지킴으로 나아오길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신 이유는 우리가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엔 거대한 간격이 존재합니다. 이쪽 절벽에서 저쪽 절벽으로 뛰어 건널 수 없듯, 인간은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이 계신 영역에 건너갈 수 업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 4:14-16)


라틴어로 제사장은 pontifex이고, 이는 '다리'(pons)와 '만들다'(facio)의 합성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다리를 만드는 분이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다리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제사장 제도는 하늘 위에 있는 참된 제사장의 직무에 대한 표현일 뿐, 삶을 바꾸는 능력은 없습니다 (히 8:5, 10:1, 4). 따라서 율법을 아무리 열심히 지켜도 인간의 마음을 괴롭히는 양심의 가책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히 9:9-10)

그러나 예수그리스도의 참된 제사는 양심을 깨끗케 합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히 9:14)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 양심에 뿌려질 때, 우리 양심은 더 이상 과거에 지은 죄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고, 이렇게 마음에 평안을 얻어야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되는 법이죠.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해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담대하게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히 11:19, 20 )

우리가 자신을 바라본다면 결코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합니다. 시편기자가 말했듯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시 130:3).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기 원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 12:2)


예수는 믿음의 주(원어의 의미로는 '시작하는 이')요 온전케 하시는 이('완성하는 이')이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믿음을 갖게 인도하신 분이고, 또한 언젠가 우리 믿음이 완성되도록 지금도 우리를 이끄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눈을 그분께 맞추고 그분이 어떠한 일을 하셨는지, 그분이 누구신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분을 바라보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의 임재 가운데로 초청하십니다 (히 10:22, 4:16). 우리는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는 없습니다. 오직 '예수를 바라보는' 자만이 하나님의 임재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담대히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시선을 우리 자신으로부터 돌려 예수께 고정시킨다면 우리는 참으로 자유롭게 되고, 하나님의 임재가운데서 그분과 교제하는 즐거움을 누릴 것입니다.

예수를 바라보며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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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

카테고리 없음 2007. 12. 16. 01:45
프랑스 YWAM에서 간사로 일하던 저는, 1996년 크리스마스를 스위스의 노샤텔이라는 아름다운 도시에서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집이 있는 장-피에르와 마들린이 저를 집으로 초청했기 때문이죠. 마침 크리스마스 동안 머물 곳을 찾던 저는 그들의 제안을 고맙게 받아들였고, 결국 그곳에서 열흘 정도 머물렀습니다. 제게는 그 기간이 곧 시작할 DTS를 준비하기 위한 충전의 시간이 되었죠.

저를 그곳에 초대한 장-피에르와 마들린 부부는 아프리카에서 여러 해 동안 선교사로 일하던 분들로, 성품이 온화하고 사람을 매우 편안하게 해주는 은사가 있었습니다. 제가 노샤텔에 머무는 동안도 제가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들과 교제하면서 이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이 부부는 각각 매우 힘든 결혼 생활 끝에 이혼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들이 지금처럼 온화하고 따뜻한 모습을 갖게 된 것은 큰 고통을 기도로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서라고 합니다. 그들이 지금 상담학교의 간사로 일하게 된 것도 그들이 이처럼 힘든 경험을 했기에 다른 사람을 돕기 원하는 마음 때문이었죠.

프랑스 YWAM에서 만난 또 다른 사역자인 제라르의 이야기는 좀 더 극적입니다. 제라르는 DTS 교장을 지냈고, 베이스 지도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저는 연말을 맞아 간사 송년회에 참석했을 때 그의 옆에 앉았다가 그의 놀라운 과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프랑스 남부에서 태어났는데, 어릴 때 부모가 죽고, 고아원에서 자라게 되었습니다. 그는 고아원에서 매우 즐겁게 살았고, 사람들이 상상하듯 힘든 일은 없었다고 합니다. 문제는 그가 성인이 되어 고아원에서 나온 후, 나쁜 친구들의 꾐에 빠져 범죄의 길로 접어들게 된 것입니다. 어느 날 그는 친구들과 물건을 훔치고 있었는데, 갑자기 나타난 중무장 경찰들에 의해 체포되었습니다. 당시 그는 군에서 복무하던 중이었기에 문제가 매우 커질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그의 상관이 잘 무마해서 다행히 처벌을 면했다고 합니다. 그 이후, 그는 어떤 여자를 사귀게 되었고, 그 여자의 부모와 친해져서 결국 그 부모가 그를 양자로 받아들였고, 많은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주께 돌아와 지금은 YWAM에서 주를 섬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저와 함께 그의 이야기를 들은 윌리엄은 나중에 제게 "나는 그가 크리스천 가정에서 아무 문제없이 자라온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더군요. 저라도 그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면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도 장-피에르와 마들린 부부처럼 사람이 겉으로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았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다른 삶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90년대에 방영하던 21세기 위원회라는 프로그램에서 본 환경미화원인데,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활동을 많이 해서 칭찬 릴레이의 주인공으로 뽑혔던 인물이지요. 진행자가 그를 찾아가자, 그는 자신이 매주 5kg의 소고기를 사다가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최근엔 수기 공모전에 글을 써 탄 상금 20만 원에다가 자신의 돈 10만 원을 보태서 기부했다고 신이 나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과거에 술에 절어 폐인처럼 사는 ‘개고기’(그의 표현) 었지만, 이제 신앙의 힘으로(그의 목에는 십자가가 걸려 있었습니다) 완전히 변화되어 이제는 새로운 삶을 산다고 말했습니다.

방송이 끝날 즘, 그는 카메라에 대고 아이들에게 "중간고사 잘 봐 아버지 좀 기쁘게 해다오" 하고 말한 후, 갑자기 울먹이는 목소리로 집을 나간 아내에게 호소했습니다. ‘여보, 지난 십 년간 당신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소. 나는 요즘도 매일 당신이 집에 돌아오도록 기도한다오. 부디 이 방송을 보거든 꼭 돌아오도록 하오. 당신만 돌아온다면 모든 일이 잘되는 것이오.’ 그는 눈물을 흘렸다. 그의 아내는 아이들이 여섯, 일곱 살 때 집을 나갔다고 합니다. 그는 쓰레기차를 몰고 다니면서 아이들을 키웠다고 합니다. 남들을 위해 많은 선행을 하는 그에게, 그렇게 가슴 아픈 사연이 숨어있던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남을 부러워하면서 삽니다. 이 사람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고, 저 가정은 절대 싸움이 없을 것처럼 보이며, 저 목사님은 신앙의 회의 같은 것은 없을 것처럼 보이죠. 하지만, 이처럼 우리가 부러워하는 모습은 실은 우리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입니다. 모든 인간은 어두운 과거, 잊고 싶은 기억, 떨쳐버리기 어려운 죄책감이 있고,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죠. 아무리 완벽해 보이는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나만 빼고 다른 사람은 다 훌륭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연약한 모습은 감추고, 남의 위대한 모습만 따라가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다 보면 자신의 진실한 모습은 더욱 드러내기 어려워지고, 남이 나의 문제를 알게 되면 어떻게 할까 하는 두려움만 커집니다.

만약 우리가 더 이상 꾸밈 없이, 더 이상의 남에 대한 환상 없이, 자신과 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다른 곳은 몰라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는 누구나 비판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드러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할 때, 모든 가식을 제거한 참된 성도의 교제가 가능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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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카테고리 없음 2007. 12. 14. 22:11
요즘 히틀러의 전기를 읽다가 발견한 흥미로운 사실은, 히틀러의 아버지(알로이스 히틀러)의 취미가 꿀벌 기르기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있어서 꿀벌 기르기는 취미의 수준을 넘어서 집착으로 발전하고, 나중에는 꿀벌을 기르는데 헌신하려고 직업을 그만두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가 왜 꿀벌 기르기에 집착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제가 보기에 그는 자신의 혼잡한 내면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려고 매우 규칙적이고 질서 있게 생활을 하는 꿀벌에 매달릴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생각을 합니다. 실제로 그는 사생아로 태어났고, 그가 태어난 다음 어머니가 결혼했는데, 이 양아버지마저 얼마 후 사망하고, 결국은 양아버지의 동생이 그를 입양해서 키우게 됩니다. 사생아로서 부끄러움을 안고 태어난 후, 결국 안정된 가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자라난 그는 나중에는 여러 여자와 관계를 맺는 등 매우 비도덕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그의 마지막 부인이 아돌프 히틀러의 어머니였는데, 매우 약하고 순종적인 여자였죠.

어릴때 부터 성격이 거센 아돌프는 계속 아버지와 충돌하게 되고, 나중에는 매우 이기적이고 고집불통이며 현실감각이 없는 젊은이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런데 가만히 그의 삶을 살펴보면, 그가 자신의 인생에 관여하려는 아버지에 대해 거세게 저항하며, 심지어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 슬퍼하지도 않았다고 하지만, 그가 정치지도자로서 보여준 모습은 꿀벌을 치던 그의 아버지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입니다. 즉, 아버지가 꿀벌들의 질서 정연한 모습을 보고 즐겼듯, 그도 독일인들을 마치 꿀벌처럼 다루면서, 그들이 극도로 질서 있는 모습으로 살아가도록 사회 제도를 개혁합니다. 히틀러 치하의 독일의 모습을 보며 '마치 생각 없는 꿀벌들의 질서 정연한 모습과 같다'고 묘사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요? 히틀러는 아들이 아버지와 건전한 관계를 맺지 못할 때 아버지의 모습을 더욱 닮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예라고 생각합니다.

히틀러가 지극히 존경했고, 그의 나치 철학의 바탕을 제공해 준 철학자 니체도 아버지와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한 예입니다. 니체의 아버지는 목사였습니다. 그런데 목사의 아들인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합니다. 과연 니체가 아버지의 모습에서 살아있는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하고도 '신은 죽었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요? 니체의 아버지가 얼마나 성공적인 사역자였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좋은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였기에 그의 아들은 고통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었고, 이 아들의 철학은 히틀러를 통해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게 됩니다.

저는 요즘 John Owen이 쓴 'On Communion with God'(하나님과의 교제)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우리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과 각각 교제를 할 필요를 설명합니다. 먼저 그는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분인가를 설명합니다. 그는 성경을 통해 성부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죠.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 줄 믿은 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요 16:26,27)

다시 말하면, '내가 너희를 위해 아버지께 간구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는 뜻입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분노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아버지의 분노를 누그러뜨리려 노력한다는 개념과는 정반대의 설명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지 않으셔도, 이미 아버지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심리학자 칼 융은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에게 분노하는 분이다'는 개념을 퍼트린 사람입니다. 그는 니체와 마찬가지로 목사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기쁨과 승리가 없는 그의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기독교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그래서 그가 찾게 된 것이 바로 영지주의입니다. 영지주의는 기독교와 이방종교의 혼합으로,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왔다는 것을 부정하고(요일 4:2-3은 이들의 가르침에 대한 경고이지요)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지 않고 신비한 지식(gnosis)을 얻는 데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거의 천 오백 년 동안 땅속에 묻혔던 영지주의는 칼 융에 의해 부활 되었고, 대중문화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한 명의 사역자가 자신의 아들에게 건전한 크리스천의 모습을 보이지 못함으로 세상에 악이 퍼진 또 다른 예이지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은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이지요. 이러한 아버지 하나님을 알 때,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의 모습을 자녀들에게 보여줄 때,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수 천명을 대상으로 하는 사역에서 성공하더라도, 아버지 하나님의 모습이 나를 통해 내 자녀에게 전달되지 못한다면, 그 모든 사역의 성공도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부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되기를 기도합니다(롬 5:5). 그래서 그 놀라운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과 늘 교제하는 삶을 살게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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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성의 회복

카테고리 없음 2007. 12. 14. 16:52
얼마전 신문에서 산에 풀어줬던 곰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환경부에서는 반달곰 새끼를 동물원에서 기르다가 어느 정도 자라서 산에 풀어줬다고 합니다. 그런데 산에서 자기 능력으로 살아가야 할 곰이 동물원에서 인간과 친하게 지내던 기억을 떨처 버리지 못하고 민가로 내려와 양봉 꿀을 퍼먹는 등 민가에 피해를 많이 입혀서 주민 항의로 할 수 없이 곰을 다시 동물원으로 데리고 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동물원 측은 러시아에서 다른 곰 새끼를 들여와 키웠는데, 지난 번의 실패를 거울삼아 동물이 인간에게 정을 붙이지 않게 하려고 먹이를 줄 때도 곰 복장을 입고 주는 등, 최대한 자연 상태로 키워서 풀어줬고, 그 결과 동면을 하는 등 정상적인 곰의 행태를 보여 정착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인간이 동물을 키우면 동물이 야성을 잃고 인간에게 길들어지는 것이 정상입니다. 관광객들이 키우는 공원의 비둘기로부터 애완용 도마뱀까지, 인간과 같이 사는 동물들은 자연 상태의 동물과는 다르게 행동하고 반응합니다. 야생 동물들도 그런 차이를 아는지, 자연 상태에선 자기가 먹을 동물 한 마리만 죽이고 말 여우가, 닭장에 들어가면 닭장 속 닭들을 모두 죽여버린답니다. 야성이 없는 닭의 모습이 여우를 자극하기 때문이겠죠.

동물이 인간에게 길들어 가듯, 인간도 인간에게 길드는 법입니다. 인간은 모두 자기가 사는 지역, 친지, 가족에게 길들어 삽니다. 그리고 이렇게 길들지 않고 사는 사람은 길들어 사는 사람의 멸시를 받죠. 정처없이 떠도는 유목민은 정착 생활을 하는 농경민의 멸시를 받고, 집없이 돌아다니는 사람은 '떠돌이'로 낙인 찍힐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에겐 유랑에 대한 거대한 갈망과 함께 거대한 두려움을 느끼죠.

유럽으로 오기 전 공항에 있는 은행에서 일을 보는데, 그곳 여 직원이 내게 어디로 가고 얼마나 있다 오는지를 물었습니다. 유럽에서 몇 달 있다 온다고 답했더니, 들릴듯 말듯 반쯤 혼자말로, "아, 나도 유럽에 여행 가고 싶은데... 시간이 없어서..." 하더군요. 이 직원이 매일 수 백대의 비행기가 떠나는 공항에서 일하면서도 여행을 떠나지 못하고 여행을 떠나는 사람을 동경만 하는 까닭은 자신의 환경에 길들어졌기 때문이겠죠다. 안정된 직장에서 잘 아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사람이 뭣하러 잘 모르는 나라에 가겠습니까? 혹시 간다고 해도 많은 관광객 처럼 안정된 상황(좋은 숙소, 믿을 수 있는 가이드)만 추구하다 오겠지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 인류 구속의 새 장을 쓰기 원하실 때, 그분은 아브라함에게 '아비, 본토, 친척 집을 떠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당시는 아브람)은 본토는 떠났지만, 아비와 친척은 떠나지 못하고 같이 여행을 시작합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에 가던 도중, 하란이라는 도시에서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죽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서 가서 정착하는 과정에서 아브라함과 롯이 결별합니다. 그러고 나서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약속의 땅을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처음에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아비, 본토, 친척 집을 떠나고 나서야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던 것이지요.

우리는 '아브라함은 바보같이 왜 처음부터 다 떨치고 약속의 땅으로 용감하게 혼자 나가지 않았나? 왜 수십년을 아버지와 친척과 동행함으로 허비했을까?'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인간에게 길들은 인간은 인간을 떠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당시 세계 최고의 문명국 갈대아 출신의 아브라함으로선, 후진국 가나안 땅으로 혼자 떠나기가 지극히 어렵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언어도, 문화도 다른 민족 사이에서 살아갈 생각을 하니, 아무리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다 하더라도 망설여졌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아버지 데라가 말합니다. "얘야, 가나안 땅으로 가려거든 나도 같이 가야겠다. 너 혼자 그런 위험한 곳에 어떻게 보내느냐. 내가 다 알아서 할테니 너는 그냥 나만 따라 오거라."(사도행전 7:2-3을 보면 분명히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 약속의 말씀을 받았는데, 창 11:31을 보면 데라가 아브람을 데리고 갔다고 나옵니다. 약속의 말씀을 받은 아브라함이 주체가 아니라, 데라가 주체가 되서 움직인 것이죠. 처음부터 아브라함은 주체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고 조카 롯도 말합니다.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여기 있기 싫은데, 저도 좀 데려가 주세요. 아무래도 젊은 내가 같이 가야 더 든든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아브라함은 "나는 아비, 본토, 친척 집을 떠나라는 명을 받은 사람이기에 아내를 제외한다면 아무도 같이 갈 수 없습니다"라고 답해야 했겠죠. 하지만 그 상황에서 그렇게 말하기가 어디 쉬웠겠습니까?

저는 외국에 사역하러 갈 때, 사역 전이나 후에 그 나라에 더 머물도록 일정을 짭니다. 그 나라의 모습을 경험하기 원해서이죠. 제가 좋아하는 나라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제가 좋아하지 않는 나라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저도 수용의 폭이 좁은 사람이라 나하고 잘 맞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매우 받아들이길 꺼려하죠. 저는 유럽에서도 프랑스나 이태리 같은 라틴 계통의 나라는 좋아해도, 네델란드나 독일 같은 게르만 계통의 나라는 영 잘 맞지 않습니다.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사람들 생김세도 다르니까요. 그래서 이미 유럽 생활을 몇년이나 했지만, 익숙하지 않은 유럽국가에 며칠만 있어도 우울한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내가 길들어서 익숙한 국가만 돌아다닌다면, 한국에서만 사는 것과 큰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결국 야성은 잃어버리고, 내게 익숙한 환경만 찾아다니게 될 테니까요.

하나님의 부르심은 많은 경우에 자신이 익숙한 환경을 떠나야 이루어집니다. 자신이 인간적으로 의존할 어떤 것도 없을 때, 하나님의 능력은 역사합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아브라함이 꼭 아비와 친척까지 떠날 이유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가 아비와 친척을 떠나고 나서야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가 더 이상 인간에게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를 쓰신 것이지요.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한다면, 늘 포기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자라온 환경, 내가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포기하기는 정말 쉽지 않고, 그렇게 될 때까지 수십년이 걸릴 수도 있지만, 그럴 때에만 우리는 태초부터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계획이 온전히 이루어짐을 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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