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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1.09 미지의 구름 2
  2. 2008.01.07 죽은 행실을 회개함
  3. 2008.01.04 외적 경건과 내적 경건
  4. 2008.01.03 마음의 눈
  5. 2008.01.02 [기도편지] 열매 맺는 삶
  6. 2008.01.01 삶의 균형
  7. 2007.12.31 하나님께 충실함
  8. 2007.12.29 세상으로 흐르는 강 II
  9. 2007.12.28 세상으로 흐르는 강
  10. 2007.12.27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미지의 구름

카테고리 없음 2008. 1. 9. 13:58
기도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무이고,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가르친 계명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기도를 매우 여러운 일로 생각합니다. 왜 그럴까요?

많은 사람은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할찌를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할찌 명백하게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의 모범답안인 주기도문을 가르치셨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1장 17-19절 등에서 자신이 어떻게 기도하는지를 보였으니 그의 기도를 따라 자신과 자신의 주변 사람들, 그리고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 (딤전 2:2)을 위해 기도하면 되겠죠.

어떤 사람은 "기도를 할 시간이 없다"고 말합니다. 물론 현대인이 바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시간이 없어 TV를 전혀 안보거나, 신문을 안 읽거나, 인터넷 서핑을 안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자기 전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양치질하고, 세수하고, 스킨 바르는 제 자신을 보고, "내가 기도하지 않는 것은 시간이 없는 것이 아니라 우선순위가 잘못되었기 때문이구나" 하고 깨달은 적이 있습니다.

엄밀히 말해 기도가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기도를 해도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마음 깊숙한 곳에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는 마음이 있고, 따라서 기도를 할 때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진다면 아무리 시간이 없어도 기도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기도를 할 때,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기 보다는 침묵만을 느낍니다. 기도를 해도 아무도 들어주는 존재가 없는 것 같고, 그냥 나 혼자의 노력인 듯 보일 때가 많은 것이지요.

중세 영국의 어느 수도승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미지의 구름 (The Cloud of Unknowing)이 막고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 미지의 구름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기 위해선 이러한 미지의 구름을 뚫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미지의 구름을 뚫고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바로 기도를 조금하고 말 것이 아니라 미지의 구름이 뚫릴 때 까지 하면 됩니다. 물론 영성이 깊은 사람은 기도를 시작하면 바로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찌 모르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5분, 10분, 30분을 해야 겨우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질 때까지 기도를 계속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물론 기도가 또 하나의 율법이 되면 안되겠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기도란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에 결코 놓칠 수 없는 영역입니다. 따라서 기도가 어렵다고 포기할 것이 아니라, 기도 안에서 성장하도록 더욱 기도해야 하는 것이지요.

미지의 구름을 뚫을 때 까지 기도하도록 힘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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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행실을 회개함

카테고리 없음 2008. 1. 7. 11:12
예수님은 자신이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14:6). 우리는 예수님의 뜻 안에 거할 때 생명을 얻고, 우리의 행동에도 생명이 넘칩니다. 그런데 그분이 말씀하지 않은 방법, 인간적인 방법을 취할 때, 우리의 행동은 생명이 없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고 꾸짖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마음을 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율법을 따름으로 구원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이는 육체를 따른 행동이었고, 따라서 생명이 없었지요.

성경은 이러한 행동을 "죽은 행실"이라고 부릅니다 (히 6:1, 9:14). 히브리서 기자는 기독교 신앙의 첫번째 기초로 "죽은 행실을 회개함"을 듭니다 (히 6:1).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하였다면, 가장 먼저 죽은 행실을 버려야 한다는 뜻이지요. 죽은 행실은 단지 눈에 뚜렷이 드러나는 죄악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인간적으로 이루려는 노력도 죽은 행실이지요. 아브라함도 이러한 잘못을 저지른 적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는 약속의 말씀 (창 15:4)을 받고, 자식이 생기기만을 기다렸는데, 그의 아내 사라는 나이가 너무 많아 임신이 불가능했지요 (창 16:1). 보다 못한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내 몸종 하갈과 동침하여 아이를 낳으라"고 제안합니다 (창 16:2). 그는 아내의 말대로 하갈과 동침하여 아이를 낳지만, 이는 불행한 결과를 낳습니다. 처음에 하갈과 동침하라고 제안했던 사라는 하갈이 잉태한 후 자신을 무시한다는 이유로 아브라함을 괴롭히고 (창 16:5), 나중에 이삭이 태어난 후에는 이스마엘이 이삭을 괴롭힌다는 이유로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내도록 요구합니다 (창 21:10). 결국 아브라함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내야 했고, 이스마엘의 자손 아랍족과 이삭의 자손 이스라엘은 지금도 서로를 원수로 생각하고 싸웁니다. 이러한 불행은 아브라함이 생명이 없는 행동을 했기 때문에 생겼습니다. 즉, 죽은 행실이 그의 삶에 오점을 남긴 것이지요.

저도 최근 몇 년간 추진 하던 일이 결국은 죽은 행실이라는 결론에 이르고 포기하였습니다. 그 일 자체가 나쁘지는 않지만, 내가 인간적 생각과 욕심에 따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나 도우심 없이 추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다면 더 이상 내 힘으로 이 일을 이루려고 하는 노력은 생명이 없는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러한 행동은 결과를 낳기 전에 멈추는 것이 최선입니다. 결과를 낳고 나면 오히려 문제가 더 커지기 때문에 감당하기 힘들기 마련이지요. 그나마 지금 멈출 수 있는 것이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벧후 1:3).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경건한 삶을 살 수 있다는 뜻이지요. 그분의 생명과 능력에 따른 행동만을 하며 살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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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적 경건과 내적 경건

카테고리 없음 2008. 1. 4. 17:22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면 변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인들은 모두 하나님을 만나 변한 예죠. 교회를 핍박하던 사울은 교회를 위해 핍박 받는 바울로 바뀌었습니다. 흥분 잘하던 시몬은 교회의 기둥 베드로로 바뀌었습니다. 활화산 같은 성격의 우뢰의 아들은 사랑의 사도 요한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바뀌는 것은 정상이고, 우리도 그렇게 변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적인 변화보다는 외적인 변화에 초점을 맞춥니다. 즉, 하나님을 만나 교제함으로 내면이 바뀌는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사람들이 보는 말, 행동, 옷차림 등에만 신경을 쓰는 것이지요. 특히 예수님 당시에는 이처럼 종교 행위를 겉으로 드러내길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경건한지 보이기 위해 회당이나 거리에 서서 기도하였고, 가난한 자를 도울 때는 큰 소리로 자신의 행위를 알렸습니다 (마 6:1-5).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은 외적으로 자신이 얼마나 경건한지 알리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 경건한 사람은 특정한 옷을 입어야 하고, 특정한 말투를 써야 하고, 특정한 표정을 지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은 그러한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겉모습은 진정으로 그 사람의 경건과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

바울은 어떤 음식을 먹어도 되느냐고 논쟁을 벌이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롬 14:17). 바울이 아는 하나님 나라는 음식이 아니라 내면의 문제였던 것이죠. 우리도 진정한 경건을 추구한다면, "경건의 모양"이 아닌, "경건의 능력"을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경건의 능력 없는 경건의 모양은 위선일 뿐이지요.

예수님이 가르치신 경건의 핵심은 "골방에 들어가 기도함"입니다 (마 6:6).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 그분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것이야 말로 경건한 모습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사람들이 그러한 경건을 인정하지 않을찌도 모르죠. 하지만 그가 하나님 앞에서 점차 시간을 들일 수록 그의 마음이 변하고, 그의 태도가 변하고, 결국 그의 얼굴도 변하게 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를 보았듯 (출 34:29), 사람들은 골방에서 기도를 한 사람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입니다.

올 한해는 경건에 힘쓰는 시간이 되길 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이 내 삶을 통해 드러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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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눈

카테고리 없음 2008. 1. 3. 14:54
I.
아람왕은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이다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는 장수들을 모아 놓고, "여기에서 적을 매복하자"고 결정하고 나면, 적은 꼭 그곳을 피해 다녔기 때문이었죠. 그는 "우리 중에 누군가 첩자가 있다"고 생각하였지만, 그의 신하들은 "첩자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사가 우리의 회의 내용을 알아차리는 능력 있는 것입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여 이기려면 엘리사를 먼저 죽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큰 군대를 이끌고 엘리사가 있던 도단성을 둘러쌉니다.

엘리사의 종은 아침에 일어보니 성 주변에 가득한 대군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이들이 분명히 엘리사를 죽이려 왔고, 따라서 자신도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죠. 그는 말합니다, "아아, 주인님, 이제 어떻게 합니까..."

엘리사는 답합니다. "걱정하지 마라. 우리와 함께한 군대가 저들보다 더 많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종의 눈을 뜨게 하시도록 기도합니다. 그가 기도를 마쳤을 때, 종은 눈이 열리며 산에 가득한 불말과 불병거를 봅니다. 엘리사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단지 종의 눈이 밝지 못해 그러한 사실을 몰랐을 뿐입니다 (왕하 6:8-17).

II.
야곱은 하란으로 가던 중 해가 지자 돌을 베개 삼아 베고 누웠습니다. 하지만 그는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얼마전 어머니의 지시대로 아버지를 속여 형의 축복을 받았고, 형은 그 일로 분이 풀리지 않아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너는 형처럼 이 지역 여자들이랑 결혼하지 말고 멀리 있는 우리 일족의 여자와 결혼해 오거라"하고 명령하였기에 먼 길에 나섰습니다. 그는 가진 것도 없었고, 가족도 없었고, 계획도 없었습니다. 오직 불확실한 미래만이 그 앞에 놓여 있었죠.

그는 꿈을 꿉니다. 눈 앞에는 사다리가 보이고, 사다리 위로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음성이 그의 귀에 들립니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그는 깜작 놀라 꿈에서 깹니다. 그는 말합니다. "아, 여기는 하나님이 계시는 땅인데, 내가 몰랐구나." 그는 자신의 삶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창 28:1-22)

III.
글로바는 친구와 함께 예루살렘에서 걸어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며칠 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셨다는 여자들의 말이 사실일찌에 대해 친구와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었죠.

그런데 어느새 옆에 한 사람이 나타나더니 말을 겁니다 "무슨 일이 있나요?" 그는 이 사람에게 나사렛 예수의 죽으심에 대해, 그리고 그분을 봤다는 목격자들의 증언에 대해 말합니다. 이 사람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면 죽었다 부활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소? 이는 이미 율법에 예연한 바입니다" 하고 설명해 줍니다. 그는 그의 설명을 들으며, 예수의 죽음이 단지 우연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숙명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글로바와 그의 친구는 이 사람을 붙잡고, "우리와 함께 머물면서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오" 하고 간청을 합니다.

결국 이들은 함께 식사를 하게 되는데, 이 사람이 떡을 떼는 손에 난 못자국을 보고, 글로바와 그의 친구는 깨닫습니다.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설명해준 이 사람은 바로 그리스도 그분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증거합니다. (눅 24:13-35)

IV.
우리는 우리의 인생이 어둡고 힘들다고 느끼지만, 문제는 인생이 아니라 마음의 눈이 닫힌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의 눈을 뜰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 옆에 계신 그리스도를 보고, 우리 인생의 의미를 새롭게 깨달을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 1:18-19)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의 눈을 밝히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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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편지] 열매 맺는 삶

카테고리 없음 2008. 1. 2. 13:32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합니다. 모두 평안하시지요. 새해를 맞아 오랜만에 인사도 드릴겸 기도편지를 씁니다.

2007년은 원래 바쁘고 사역이 많은 해가 될 예정이었습니다. 봄에는 호주에서, 가을에는 독일에서 세계관학교 간사로 섬길 예정이었고, 여름에는 브라질 Pan Americano 체육대회 전도여행이 잡혀있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학생수 부족으로 호주와 독일 일정이 취소되면서 브라질만 다녀오게 되었고, 그래서 대부분의 시간을 한국에서 보내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있으면서 로렌 커닝햄의 "열방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책" 번역을 마무리했고, 여러 곳에서 통역으로 섬기긴 했지만, 크게 봐서는 시간의 여유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몇년째 씨름하던 선교에 대한 책도 마무리할 수 있었고, 세계관에 대한 책도 많이 쓸 수 있었죠.

책을 쓰는 사역은 평소에 늘 생각만 했었는데, 이제 실체가 드러날 정도로 진전이 되어서 기쁩니다. 아마 첫 번째 책은 올해 여름쯤 나오리라고 예상합니다. 또한 새로운 방식으로 대중을 만나기 위해 시사 블로그 세상을 바꾸는 블로그를 운영하였고, 그리스도인을 위한 블로그인 열매 맺는 삶도 시작하였습니다. 특히 열매 맺는 삶은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방문객은 적지만, 앞으로 매일 짧은 글을 통해 받은 은혜를 나누는 장소로 키우고 싶습니다.

작년에 가장 많이 생각한 주제는 열매 맺는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가장 먼저 주신 명령은 "열매 맺으라!" (Be fruitful) 였습니다. 하나님은 같은 명령을 아브라함을 비롯한 자신의 백성에게도 반복하시지요. 예수님도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15:16). 하나님이 인간에게 원하시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열매인 것이지요.

열매는 식물의 자기복제입니다. 그 식물의 핵심은 열매에 그대로 반영됩니다. 사과나무나 배나무나 줄기에서 가지가 나고, 가지에서 잎사귀 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사과나무는 사과를 맺고, 배나무는 배를 맺는데서 정체성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도 자신의 모습을 반영하는 열매를 맺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나무일 뿐 아니라 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요 15:1)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요 15:4)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포도나무에서 나오는 진액을 우리의 특성에 맞게 소화해 열매로 맺는 것이 우리 삶의 목표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내 인생의 열매는 무엇일까 생각을 해봤는데, 결론은 내가 쓰는 글이 내 열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책을 쓰거나 블로그를 운영하는 것도 이러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점에서 처음 시작한 시사 블로그가 두 달 사이에 24만 명이 방문할 정도로 인기가 있다는 사실은 고무적입니다. 이제 많은 사람에게 내 글을 알릴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이제 시작하는 단계라 많이 부족하지만, 앞으로도 글을 통한 열매 맺기는 계속 힘쓸 생각입니다. 성경은 사역의 열매, 성품의 열매, 입술의 열매, 몸의 열매 등 많은 열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삶의 모든 부분에서 이러한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드리도록 노력하게습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올 한해 많은 열매를 거두어 주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시길 기도합니다. 오랫동안 얼굴을 못본 분들에게 특별한 그리움의 인사를 드립니다.

사랑합니다.


김성원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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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균형

카테고리 없음 2008. 1. 1. 00:31
사역자로 10년 이상 일하면서, 절실히 깨닫는 한가지는 장기사역을 생각한다면 늘 균형잡힌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삶의 균형이 무너진다면, 오래 사역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겠죠.

한국에서 처음 대학사역을 할때, 대학사역의 분위기를 따라 저도 참 정신없이 바쁘게 살았습니다. 연일 이어지는 사역, 불규칙한 스케쥴, 밤늦게 시작되는 교제의 시간... 물론 운동은 꿈도 꾸지 못할 상황이었죠. 뭐 엄밀히 말하면 다 주를 위해, 그리고 학생들을 위해 그렇게 한 것이니 잘못은 아니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너무 내 자신을 돌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겨울 전도여행이나 여름 MC 한번 치르고 나면 지쳐서 탈진하곤 했죠. 이처럼 극단적으로 올라갔다 극단적으로 내려가는 삶이 결국은 몸에 무리를 주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스위스의 유명한 상담가이면서 의사인 폴 투르니에가 쓴 인격 의학 (Medicine de la Personne)을 읽으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인간의 질병은 결국 지나친 열정 (passion)에서 나온다. 꼭 음식에 대한 것 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과식은 좋지 않은 결과를 낳는다. 심지어 운동이 결여된 지나친 독서도 이런 부류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책을 좋아하는 저에게는 참 마음에 와닿는 말입니다. 교회가 금연을 주장하는 것은 그것이 몸에 해롭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운동의 부족이나 과식 또한 같은 수준으로 정죄(?)되어야 마땅할 것인데, 담배를 피는 사람은 대단히 문제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밥을 매 끼 두그릇씩 먹는 사람은 '거참 밥 맛있게 먹는다'고 칭찬하는 태도는 올바르지 못하겠죠.

바울은 '우리는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이다'고 말했습니다 (갈 5:24). 그런데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에 아직도 욕심이라는 것이 참 많이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밤에 인터넷을 하다보면 잘 시간이 넘었는데도 인터넷을 끊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것 때문에 묵상 시간이 지장을 받고, 수면이 부족하여 건강에 해를 받으면서도 욕심대로 살지 않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공부 할때도 학점 좀 더 높게 받고 싶은 욕심, 사업 할 때도 돈 좀 더 벌고 싶은 욕심, 교회에서도 좀더 인정받고 싶은 욕심에 우리는 우리 몸을 혹사하고, 그 결과는 중년 이후의 심각한 질병으로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다가오는 새해에는 좀더 균형 잡힌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겠습니다. 식사에 관해서도, 수면에 관해서도, 운동에 관해서도, 일에 관해서도 균형있게 살아야 겠다고 생각합니다. 주를 섬기는 것이 단거리가 아니라 장거리 경주라면 지금부터 올바른 속도로 뛰는 것이 중요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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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충실함

카테고리 없음 2007. 12. 31. 22:44
예수의 동생이었던 야고보는 성격이 곧고 바른말 하기를 좋아해 "의로운 야고보" (James the Just) 라는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그는 야고보서에서 점차 세속화하는 교회를 향해 이렇게 경고하였습니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 (약 4:4)

그는 이 구절에서 우리가 세상과 벗된다면 이는 하나님과 결혼관계에서 부정을 저지르는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한 것입니다.

결혼은 두 사람이 서로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기로 결정하는 행위입니다. 만약에 내가 배우자가 아닌 다른 어떤 대상을 더 사랑한다면, 이는 육체관계 여부와 상관 없이 부정이고, 결혼을 깨트리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신부로 부르신 것은 우리가 그분을 가장 사랑하도록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바쁘기에 하나님은 잊고, 우리의 생활에만 집착합니다. 직장 생활을 하고, 가정을 돌보고, 친구를 만나는 가운데, 우리는 우리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이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사실을 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의 신부로서 얼마나 그분을 사랑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마 10:37)


그분은 우리가 가족을 향한 사랑보다 그분을 더 사랑하기를 기대하시는 것이지요. 실제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자식을 제사로 바치는 시험을 통과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이 가르치고자 했던 것은 우리의 마음이 가장 사랑해야 하는 대상은 하나님이고, 다른 어떠한 대상이라도 그분의 자리를 차지한다면, 이는 곧 제거해야 하는 우상이 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자식조차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면 안될찐대, 돈이나 직업의 성공 등 다른 대상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빼앗아서는 안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2007년을 보내며, 내 마음은 얼마나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했는지 되돌아봅니다. 내가 하나님보다 세상을 사랑하지는 않았나 반성해 볼 때, 하나님 앞아서 많은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새로 시작되는 한 해는 더욱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커지기 바랍니다. 그래서 더 이상 부정을 저지르는 배우자가 아닌,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로 준비되기 원합니다.

이 블로그를 찾는 모든 분들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더욱 커지는 한해를 맞으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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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으로 흐르는 강 II

카테고리 없음 2007. 12. 29. 16:55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우리 속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갑니다. 이 생수의 강을 세상에 전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이지요.

그렇다면 "세상에 생수의 강을 흘러보낸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저는 하나님의 임재의 향기를 발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싶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머물 때, 그의 삶을 바뀝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나왔을 때, 그의 얼굴에서는 광채가 났습니다 (출 34:29). 이는 그가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였기에 그의 존재가 바뀌었기 때문이죠. 우리도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면 삶이 바뀌면서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후 2:14)

우리가 하나님을 따르는 삶을 살 때, 우리의 삶에선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가 나기 마련입니다. 세상 사람은 이러한 냄새를 맡을 때, 하나님의 존재를 알게 되는 것이지요.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풍기지 않는다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전통적인 표현을 쓴다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상서로운 기운을 풍기는" 존재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가는 곳에는 싸움이 멈추고 화해가 일어나고, 미움이 사랑으로 바뀌고, 혼동이 멈추고 질서가 회복되어야 정상입니다. 마치 매마른 땅에 비가 내리듯, 광야에 생수가 흘러가듯, 그리스도인이 없던 곳에 그리스도인이 가면 변화가 일어나야 정상이지요.

이러한 외적인 변화는 그리스도인의 마음 속에 생명의 주 (행 3:15)가 거하시고 활발하게 활동하실 때만 가능합니다. 즉, 하나님과 깊은 교제로 인해 내면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가득할 때, 그 생명은 밖으로 흘러나가 세상을 바꾸는 것이지요.

많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살며 세상에 물들 것을 걱정하지만, 우리의 목표는 세상에 물들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세상에 하나님의 강을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임재 가운데 거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임재를 자신이 가는 모든 곳에 전할 것입니다.

오늘도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대표자로 살아가는 모든 분들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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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으로 흐르는 강

카테고리 없음 2007. 12. 28. 14:54
성경은 하나님의 임재에서 흘러나오는 강에 대해 네 번 언급합니다.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창 2:10)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장막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시 46:4)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 내리더라 (겔 47:1)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계 22:1)

즉, 성경은 하나님의 강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의 강으로 끝납니다. 그렇다면 이 강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강은 생명의 근원인 물의 흐름입니다. 대부분의 생명체는 수분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고, 특히 커다란 생명체는 더욱 물을 의존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생명의 근원인 물은 바로 영적인 생명의 근원인 성령의 상징으로 볼 수 있죠 (막 1:8, 요 3:5, 행 1:5).

하지만 물이 머물러 있으면 강일 수 없습니다. 물이 밖으로 흘러 나가야 강이지요. 성경이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흘러나가는 강을 보이는 이유는, 하나님의 임재가 한 곳에 머무를 수 없고, 계속 바깥으로 흘러가야 한다는 사실을 뜻합니다.

우리는 신앙이란 개인의 문제이기에, 결국 마음의 영역에서 끝난다고 봅니다. 하지만 이는 성경의 가르침과 전혀 다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임재는 마음에 머물지 않고, 강이 되어 세상으로 흘러나간다고 말하였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흘러나온 네 강은 실체였습니다. 계시록에 나온 보좌로부터 흘러나온 강도 미래에 실체로 드러나겠죠. 하지만 시편과 에스겔서의 강은 실체가 아닌, 환상입니다 (예루살렘에는 강이 없습니다). 즉, 역사는 강에서 시작해 강으로 끝나는데, 역사의 중간에는 강이 없는 셈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역사를 흐르는 강이 실제로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요 7:38)

그렇습니다. 역사를 흐르는 강은 바로 우리 믿는 자의 삶에서 흘러나옵니다. 우리에게서 흘러나오는 강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에서 나오는 강이고, 이 강은 세상으로 흘러나가 세상에 생명을 주는 강입니다.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는 지극히 힘듭니다. 세상에서 신앙을 유지하고 살기도 힘든데, 세상에 생명을 주며 살기는 더욱 힘들죠. 하지만 세상에 생수를 흘러보내는 강의 역할은 우리에게 피할 수 없는 임무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이죠.

내일은 세상에 생수를 흘러보내는 일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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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카테고리 없음 2007. 12. 27. 20:52
"하나님은 아가페시다"라고 요한은 선포했습니다 (요일 4:8). 앞서 보았듯, 아가페는 하나님의 본성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이고, 완벽한 사랑이고, 모든 것을 뛰어 넘는 사람입니다. 아가페는 세상을 위해 독생자를 보내는 사랑이고 (요 3:16),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랑이고 (요 15:13),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롬 5:8).

하나님은 아가페이시기에, 우리에게도 아가페를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agapeo, 아가페에서 파생한 동사)"는 구약의 명령이 우리에게도 가장 중요한 계명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마 22:37).

문제는 우리 마음 속에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되, 그냥 조금 사랑합니다. 정직하게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예배가운데 은혜를 받는다면 기뻐서 눈물을 흘리지만, 직장이나 가정에 어려움이 생긴다면, "하나님, 왜 나를 이처럼 괴롭히십니까?"하고 따지는 사람들입니다. 이는 아가페 사랑에서 너무나 먼 모습이지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는 바로 이러한 심정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다 주를 버릴찌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라고 자신있게 말했지만 (마 26:33), 막상 유대인들이 앞에선 겁을 먹고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한 자입니다.

베드로의 사랑이 아가페였을까요? 그는 목슴을 바쳐서 에수를 사랑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상황이 좋을 때는 누구 보다 예수님을 사랑한 듯 하지만, 상황이 바뀌면 예수님을 버리는 자였습니다.

이제 갈릴리에서 어부로 돌아간 그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십니다. 그분은 베드로가 어떤 사람인지 아셨고, 베드로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은 깨달았죠. 예수님이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아가파오) (요 21:15)

베드로는 이렇게 답합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필레오, philos에서 온 동사) 주께서 아시나이다 (요 21:15)

예수님은 아가페 사랑에 대해 물으십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자신의 과거 때문에 아가페 사랑을 표현하지 못합니다. 그는 필레오, 즉 친구의 사랑에 대해서만 말하지요. 그는 분명히 예수님을 친구로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성품에서 흘러나오는 완벽한 사랑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었지요.

다시 예수님은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아가파오) (요 21:16)

베드로는 다시 답합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필레오) 주께서 아시나이다 (요 21:16)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필레오) (요 21:17)

성경에 따르면 베드로는 예수님이 세번째에는 "사랑하느냐" (필레오)고 물으셔서 마음이 아팠다고 합니다. 그는 답합니다.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필레오)주께서 아시나이다 (요 21:17)

결국, 예수님은 베드로의 수준으로 내려오시고, 그에게 다른 어떠한 주문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가페를 표현할 준비가 되지 않은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너는 왜 아가페가 없느냐? 왜 필로스밖에 없느냐?"고 꾸짖지 않으시고, "네가 필로스 밖에 없다면, 그것을 내게 다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기준은 높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그러한 기준을 따라가기 힘들다고 느끼지요.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가 지금 있는 수준에서 우리를 만나십니다.

우리가 살 소망이 있는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무한히 넓은 마음 때문입니다. 바로 아가페의 마음이지요. 그분의 사랑을 생각할 때에, 내가 아무리 약하고 악한 자라도 그분께 나아갈 담대함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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