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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12.26 아가페
  2. 2007.12.25 목적과 수단
  3. 2007.12.25 T.S. Eliot, 동방박사의 여행 (Journey Of The Magi)
  4. 2007.12.24 크리스천과 자본주의
  5. 2007.12.22 [단어 연구] 은혜
  6. 2007.12.21 아버지의 마음을 품은 사역자
  7. 2007.12.20 사랑의 감정
  8. 2007.12.19 죽음을 준비함
  9. 2007.12.19 여유
  10. 2007.12.18 도덕적 파산

아가페

카테고리 없음 2007. 12. 26. 17:28
히브리어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스라엘 민족이 대대로 쓰던 언어입니다. 따라서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언어 자체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에 적합하도록 발달하였지요. 예를 들어, 헤세드라는 단어는 단지 인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자들에 대해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함 없이 보이시는 특별한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레미아가 멸망해가는 유다왕국을 향하여 "여호와의 헤세드가 무궁하다"고 선포하였을 때, 유다백성은 상황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소망을 찾을 수 있었죠 (애 3:22).

그에 비해 헬라어는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그리스 사람들의 언어이고, 따라서 신약성경 저자들은 하나님과 상관 없이 발달한 헬라어라는 새로운 언어로 하나님의 뜻을 전해야 하는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특히 신약 성경의 주제인 "사랑"이라는 말은 헬라어로는 표현하기가 극히 힘들었죠.

헬라어에 사랑을 뜻하는 단어가 몆가지 있기는 하지만, 어느 단어도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에로스는 열정적인 사랑이면서 동시에 육체적인 사랑입니다. 이러한 사랑은 때로 극단적으로 이기적일 수 있지요. 스토르게는 가족적이며 따뜻한 사랑이지만, 강렬한 느낌이 떨어집니다. 필리아는 친구간의 애정, 사랑인데, 절대적인 사랑에는 못미칩니다.

따라서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70인역의 전통을 따라 agape라는 단어를 받아들입니다. 신약이 말하는 아가페는 하나님의 본성에서 나오는 절대적인 사랑이지요.

아가페의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가페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아가페하자 아가페는 하나님께 속한것이니 아가페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아가페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아가페이심이라 (요일 4:7-8)


하나님은 아가페이시기에 그분의 행동도 아가페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아가페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아가페로 초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아가페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아가페하였으니 나의 아가페 안에 거하라 (요 15:9)

이처럼 하나님의 아가페를 받은 사람은 아가페를 실천하면서 삽니다. 아가페를 실천하는 삶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삶입니다.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아가페가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요일 2:5)

하나님의 아가페를 마음에 품은 사람은 아가페의 성품을 보입니다. 바울은 아가페의 성품을 이렇게 말합니다.
아가페는 오래 참고 아가페는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아가페는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 13:4-7)


우리는 삶의 모든 행동을 아가페에 근거하여야 합니다.
너희 모든 일을 아가페로 행하라 (고전 16:14)
이 모든 것 위에 아가페를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골 3:14)

이웃을 대할 때도 아가페를 따라야죠.
아가페는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아가페는 율법의 완성이니라 (롬 13:10)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아가페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벧전 4:8)
특히 그리스도인은 서로에게 아가페를 보여야 합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아가페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아가페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요 15:12)

만약 우리가 세상을 아가페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아가페를 떠난 것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아가페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아가페하면 아버지의 아가페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요일 2:15)

하나님은 아가페를 떠난 사람을 꾸짖으십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아가페를 버렸느니라 (계 2:4)

아가페는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하나님이 없이 이웃에게 아가페를 나누려는 시도는 늘 실패할 수 밖에 없지요. 하지만 우리는 아가페의 부족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속에 아가페를 부어 주시기 때문이죠.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가페가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롬 5:5)

결국, 중요한 것은 아가페이신 하나님을 늘 만나고, 늘 그분의 아가페에 거하고, 늘 아가페를 바탕으로 사는 것이겠죠. 이것이 바로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삶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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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과 수단

카테고리 없음 2007. 12. 25. 16:12
제가 군대에 있을 때, 훈화 시간에 어느 장교가 군에 있을 동안은 종교활동도 열심히 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종교활동을 열심히 한 군사는 전투력도 좋다"는 말을 하더군요. 살생을 금지하는 불교나 인류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는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사람 죽이는 능력이 더 뛰어나다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찌 당황했던 기억이 나는군요.

꼭 그 장교 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종교를 어떠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듯 합니다. 예를 들어 자신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 부모도 아이들은 "착한 사람이 되라고" 교회에 보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해외에서 한인교회는 단지 교회일 뿐이 아니라 교제, 사업, 쇼핑 등을 한 번에 해결하는 한인사회의 핵심이죠. 또 자녀의 입시가 다가오면 자녀를 원하는 대학에 합격시키기 위해 안 다니던 교회나 절로 나오는 분도 많을 것입니다.

저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의 유익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때가 많음을 느낍니다. 예를 들어, 무언가 어려운 일이 벌어지면, 기도도 열심히 하고, 하나님이 실어하실 만한 일은 삼가다가, 중요한 고비가 넘어가 마음에 여유가 생기면, 기도도 등안시 하고, 삶의 태도도 느슨해 지는 제 자신을 보게 됩니다. 부끄러운 일이지요.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사랑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떠한 대상을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사랑한다면, 그에게는 다른 목적이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내가 하나님을 이렇게 사랑하니, 재정적 어려움은 없어지겠지. 내 자식은 좋은 대학 들어가겠지" 하는 생각을 할 여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목적이고, 다른 모든 것은 수단일 뿐이지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태도는 그러한 태도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셨을 때, 그분은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셨습니다. 자기 아들의 목숨을 버리기까지 사랑하셨으니, 그분에게 인간은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였죠. 진정한 사랑이란 늘 사랑의 대상을 최고의 목적으로 놓기 마련입니다. 만약 이 사랑을 통해 무엇을 얻고자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겠죠.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그 아들을 보내심을 기념하는 크리스마스를 맞아, 나는 하나님을 얼마나 내 인생의 목적으로 놓고 있는지 반성해 봅니다. 하나님이 날 무조건 사랑하시듯, 나도 하나님을 무조건 사랑하기 원합니다. 내 삶의 모든 순간은 그분을 향한 사랑의 수단이길 원합니다. 주께서 내 마음을 깨끗케 하사, 세상을 향한 사랑을 모두 제거하시길 기도합니다. 그래서, 내 마음이 그분이 기쁘게 거하실 거처로 마련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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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 Eliot, 동방박사의 여행 (Journey Of The Magi)

카테고리 없음 2007. 12. 25. 12:47
T.S. Eliot이 쓴 동방박사의 여행 (Journey Of The Magi)이라는 시를 소개합니다. T.S. Eliot은 많은 고민 끝에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 그는 이 시에서 자신이 신앙을 찾기까지 겪은 갈등과 번뇌를 동방박사의 고통스러운 여행을 통해 표현합니다. 그리고 예수를 만난 동방박사의 삶이 바뀌었듯, 자신의 삶도 바뀌었음을 고백하죠.

우리 구주 예수님이 나신 날, 그분의 죽음으로 생명을 얻은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Journey Of The Magi

'A cold coming we had of it,
Just the worst time of the year
For a journey, and such a long journey:
The ways deep and the weather sharp,
The very dead of winter'
And the camels galled, sore-footed, refractory,
Lying down in the melting snow.
There were times we regretted
The summer palaces on slopes, the terraces,
And the silken girls bringing sherbet.
Then the camel men cursing and grumbling
And running away, and wanting their liquor and women,
And the night-fires going out, and the lack of shelters,
And the cities hostile and the towns unfriendly
And the villages dirty and charging high prices:
A hard time we had of it.
At the end we preferred to travel all night,
Sleeping in snatches,
With the voices singing in our ears, saying
That this was all folly.

Then at dawn we came down to a temperate valley,
Wet, below the snow line, smelling of vegetation;
With a running stream and a water-mill beating the darkness,
And three trees on the low sky,
And an old white horse galloped away in the meadow.
Then we came to a tavern with vine-leaves over the lintel,
Six hands at an open door dicing for pieces of silver,
And feet kicking the empty wine-skins.
But there was no information, and so we continued
And arrived at evening, not a moment too soon
Finding the place; it was (you may say) satisfactory.

All this was a long time ago, I remember,
And I would do it again, but set down
This set down
This: were we led all that way for
Birth or Death? There was a Birth, certainly,
We had evidence and no doubt. I had seen birth and death,
But had thought they were different; this Birth was
Hard and bitter agony for us, like Death, our death.
We returned to our places, these Kingdoms,
But no longer at ease here, in the old dispensation,
With an alien people clutching their gods.
I should be glad of another dea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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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과 자본주의

카테고리 없음 2007. 12. 24. 12:31
저는 이 블로그 외에도 세상을 바꾸는 블로그 (cimio.net)와 Vision & Logic (visionandlogic.net)
을 운영합니다. 이 블로그에는 광고를 달지 않았지만, 나머지 두 블로그에는 광고를 달았죠. 요즘 많은 블로그에 광고가 달렸지만, 저는 광고를 달면서 나름대로 대단한 고민을 하였습니다. 광고를 다는 것이 그리스도인에게 올바른 행동인가? 사람들이 보고 시험에 들지는 않을까? 이런 질문이 머리속에 떠올랐죠. 물론 한 달에 광고로 들어오는 수입은 고작 하루나 이틀 통역으로 버는 돈보다 많지 않기 때문에 재정적 의미는 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내가 드러내 놓고 돈벌이를 한다는 사실 자체는 대단히 부담스럽게 느껴졌죠.

그런데 저는 성경에서 이러한 고민에 대한 해답을 찾았습니다. 바울은 장로들에게 봉급을 줄 것을 디모데에게 가르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딤전 5:18)

우리는 장로는 당연히 무보수 봉사직이라고 생각하지만, 바울은 장로도 열심히 일한다면, 당연히 월급을 줘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물론 그 당시 장로는 실제로 말씀을 가르치는 역할도 했다는 점에서 (딤전 5:17) 오늘날의 장로보다는 목사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겠죠. 즉, 그의 말은 "사역자는 사역의 댓가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뜻입니다.

제가 블로그에 광고를 단 이유도, 블로그 운영에 들어가는 노력의 댓가를 일부나마 돌려받기 원해서였습니다. 많은 사람은 "인터넷은 무조건 공짜이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이는 성경에 나온 원칙은 아닙니다.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댓가 지불이 성경의 원칙이지요. 물론 바울은 많은 교회에서 일하면서 돈을 받지 않았습니다. 이는 교회가 시험들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죠. 만약 그가 교회를 세우자 마자 헌금을 거두어 떠난다면, 분명히 "저 사람은 돈을 벌기 위해 전도한다"는 말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의심을 살만한 환경이라면, 바울은 돈을 받지 않았을 뿐입니다.

제가 얼마 안되는 돈을 벌면서도 마음이 꺼림직했던 이유는, 돈에 관한 교회의 뿌리 깊은 불신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교회는 많은 헌금을 거두어 예산을 집행하면서도, 표면적으로는 노동을 통해 돈을 버는 것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보는 태도를 보입니다. 특히 사역자들 사이에는 이러한 분위기가 많습니다. 물론 사역자가 본분을 잃고 돈벌이에 혈안이 된다면 잘못이지만, 노동을 해서 돈을 버는 것 자체는 바울도 했던 일이고 (행 18:3, 살후 3:8), 오히려 바울은 범죄 활동으로 살아가거나, 일하지 않고 노는 사람에게 떳떳한 직업 (honest job)을 가지도록 가르쳤습니다 (엡 4:28, 살후 3:11). 따라서 어떤 사람이 생계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합당한 행동이지요.

하지만 이 말은 돈을 벌기 위해 미친듯이 일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탐욕을 근거로 하는 체제이고,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사람은 그냥 돈을 벌기 원하지 않고, 엄청나게 돈을 벌기 원합니다. 옛날에는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이 있었지만, 이는 "인간은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여유만 있으면 그 이상의 재물은 필요 없다"는 생각에서 나왔기에 자본주의 정신과는 다릅니다. 자본주의 정신은 "많은 수록 좋다"입니다. 따라서 재산이 1천만 원인 사람은 1억을 가지도록 일해야 하고, 재산이 1억인 사람은 10억을 가지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자본주의 정신은 성경에서 위험하다고 경고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 (딤전 6:10)라고 말했고, 감독이 될 사람은 "돈을 사랑치 아니하"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딤전 3:3). 예수님은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 6:24)고 경고하셨고, 돈을 사랑하면서도 주님을 따르려는 젊은이에게는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막 10:21)고 도전하셨습니다.

즉, 성경은 생계를 위한 노동은 격려하지만, 사치를 위한 노동은 경고합니다. 물론 어떠한 노동이 생계를 위한 노동이고, 어떠한 노동이 사치를 위한 노동인지는 자신이 판단할 문제이지만, 이미 돈이 많은데도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또는 남보다 더 잘 살기 위해, 또는 허영심 때문에, 또는 돈이 너무 좋아서 밤낮으로 일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뜻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본주의 정신과는 다른 정신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돈을 번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지만, 돈을 사랑하기 때문에 일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일입니다. 부자에 대한 성경의 경고 (마 19:23, 눅 12:21, 16:19-31, 약 1:9-10, 딤전 6:17)는 자본주의 사회속에 사는 우리 모두를 위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부자되세요" 같은 말이 얼마나 성경의 가르침과 어긋나는지 깨닫고, 하나님께 대해 부유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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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 연구] 은혜

카테고리 없음 2007. 12. 22. 16:11
구약에서 은혜라는 의미로 사용된 히브리 단어는 chen으로 69번 등장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단어는 거의 늘 matsa라는 동사(에스더서에서는 matsa가 nasa로 대치되는 경우가 세 번 있다)와 함께 사용되어, '은혜를 입었더라'는 구절의 형태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 경우 chen의 의미는, 한국어의 '좋게 봐줌, 예쁘게 봐줌'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예쁘게 봐주다'는 표현과 관련해서, chen이 문자적으로 예쁘다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고운 것(chen)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잠 31:30)). 즉, 윗 사람이 아랫 사람을 대할 때, 여러 명이 잘못해서 벌을 줄 때도, 그중 한 명은 착해서 그런 일에 참여할 사람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으면 그 사람에게는 벌을 주지 않을 것이고(창 6:8) 그런 사람이 부탁하는 것이면 거절하기 힘들어서라도 들어줄 것이다(삼하 14:22) 또한 이렇게 윗사람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은혜 받기를 원하는 것'이라고 묘사된다(창 32:5)

이렇게 비교적 단순하던 구약의 '은혜'라는 개념은 신약 시대에 와서 큰 변화를 겪게 된다. 그리고 그 시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으로 말미암는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4, 16-17)


율법을 어긴 죄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 덕에 구원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의 복된 소식은 '은혜의 복음'(행 20:24)이라고 불리운다.

그러나 은혜는 죄인을 구원하는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신학자들은 우리가 칭의(justification)을 거쳐 성화(sanctification)의 과정을 통과하고 있으며, 언젠가 영화(glorification)에 이르게 되리라고 말한다. 그런데 은혜는 칭의의 단계에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세 단계 전체에 걸쳐 우리에게 주어진다.

  • 칭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엡 1:7)
  • 성화-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행 20:32)
  • 영화-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벧전 5:10)
은혜는 심지어, 바울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가 모태에 있을 때 부터 역사한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갈 1:15)


Thayer's Greek English Lexincon은 은혜(charis)를 이렇게 정의한다

good will, loving-kindness, favour of the merciful kindness by which God, exerting his holy influence upon souls, turns them to Christ, keeps, strengthens, increases them in Christian faith, knowledge, affection, and kindles them to the exercise of the Christian virtues.)


은혜는 이처럼 죄인을 회개케 하고, 거룩한 삶으로 유도하여, 결국 죄로 인해 이룰 수 없었던 '하나님의 영광'(롬 3:23)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따라서 그분은 모든 신자의 삶 가운데 지금도 은혜를 베풀고, 즉 그분의 계획을 이뤄가고 계신다. 그리고 우리가 해야하는 일은 이러한 그분의 은혜를 받는, 즉 주님의 역사를 따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그분의 계획 가운데로 이끈다. 그에 비해 우리의 잘못된 태도는 우리를 그분의 은혜에서 멀어지게 만든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서 먼 삶을 살 때, 우리는 '은혜에 이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히 12:15)

그에 비해, 우리가 우리를 인도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계속적으로 따라간다면, 우리의 마음은 믿음 위에 굳건히 서게 되는 것이다.

여러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히 13:9)

바울이 육체의 가시에 대해 기도하며 받은 응답의 말씀도 은혜에 관한 것이었다. 그가 육체의 가시로 인해 고통당할 때, 그래서 이것을 제거해 달라고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하셨다. 다른 말로 하자면, '나는 지금 네게 충분한 은혜를 주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의 이 고통은 그가 회개하거나 영적전쟁으로 싸워 이겨야할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계획의 한부분이라는 뜻이었다. 바울 자신이 설명하지만, 이 고통은 그가 많은 계시를 받음으로 인해 교만케 됨을 방지하기 위한 안전장치로서, 그에게 주어진 은혜의 한부분이었다는 것을 그는 나중에야 깨달은 것이다.

바울은 이처럼 그의 인생 가운데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의미를 깊이 깨달았기에,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 15:10)

즉,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형성된 삶을 살게 되었고, 그것이 감사하여 주를 위해 누구보다 더 많이 일하였지만, 그러한 노력조차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크리스천의 삶에서 은혜가 이렇게 중요한 것이기에, 바울은 그의 모든 서신서를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간구함으로 시작하였고, 특별히 고린도후서와 에베소서는 편지의 종결도 은혜의 강구로 끝맺고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찌어다 (고후 13:1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찌어다 (엡 6:24)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해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 4:16)

우리가 그분께 은혜를 구할 때, 그분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실 것이다. 그분의 은혜는 우리의 인생을 향한 그분의 master-plan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단지 순간의 어려움을 이겨낼 꾀가 아니라, 우리의 인격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하고, 우리의 삶의 거룩하지 못한 부분이 제거되도록 도와줄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은혜의 기쁨을 맛보게 된다면, 우리는 정말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사는 것이며, 우리가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어리석은 잘못은 그분의 은혜에 저항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은혜가 우리 인생에 있어서 이렇게 귀중한 것이기에, 우리는 은혜를 받을 방법을 찾게 된다. 영어에서 'means of grace'(요즘은 잘 사용하지 않지만 청교도들은 많이 사용한 표현)이라는 것이 바로 이 '은혜 받는 방법'을 뜻하는 것인데, 성경 읽기, 기도, 경건서적 읽기, 예배 등이 이에 해당한다. 즉 이런 일들을 행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고, '은혜로써 굳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 때, 우리는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된다. 다음 구절을 살펴보자.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찌니 (히 12:28)


많은 유럽어에서 은혜는 감사와 동의어로 쓰인다(불어-merci, 이태리어-grazie, 스페인어-gracias 등) 그리스어에도 동일한 용법이 존재하는데, 여기서 '은혜를 받자'고 번역된 에코 카린(echo charin)이라는 구절은 눅 17:9에서 '사례하다'(즉, 감사하다)로 번역된 것과 같은 구절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은혜를 받자'는 말은, '감사하자'는 말과 같다는 것이다(실재로 NIV, NASB, NLT등 대부분의 현대 번역본들은 이 구절을 '감사하자'는 의미로 번역한다). 성경은 감사에 대해 많은 강조를 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감사는 우리가 은혜를 받을 때만 가능하다. 은혜는 받지 않고, 율법적으로 감사만 드리려는 것은 결국 우리를 은혜에서 더 멀어지게 만들 뿐이다.

하나님을 찾는 자,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원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것이다. 그리고 이 은혜는 우리를 결국 그분의 영광으로 인도할 것이다. 그분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 지상에서의 삶부터 영광에서 영광으로(고후 3:18) 변하여지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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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마음을 품은 사역자

카테고리 없음 2007. 12. 21. 21:00
제가 10년간 YWAM에서 간사 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프랑스에서 DTS 간사로 섬기던 2003년입니다. 이 때 우리 전도여행팀에 한 미국인 학생이 있었는데, 그는 내게 매우 거친 말과 행동으로 대했고, 나는 내가 저지르지 않은 잘못에 대해 벌 받는 것 같아 매우 감정이 상했죠.

그가 나를 그렇게 미워한 이유는 내가 그의 아버지를 연상케 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감정적으로 매마른 목사님이었는데, 나이가 아주 많았을 때, 그를 낳았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중년이 되어 낳은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찌 몰라 거리감을 두었고, 그는 버려졌다는 상처를 안고 자랐죠. 그리고 DTS에 와서 권위자인 나를 보니까 아버지에 대한 미움의 감정이 몰려와 나를 미워할 수 밖에 없었지요.

저는 그 학생을 놓고 많은 고민을 해야 했습니다. 따끔하게 꾸짖으면 정신을 차릴까. 나를 괴롭히지 말라고 마음을 터 놓고 부탁을 해볼까. 아니면 그런 사람이 없는 듯 무시해 버릴까... 그런데 하나님이 제게 "저 아이가 왜 네게 그렇게 행동하는지 아느냐?"라고 물으시더군요. 하나님은 "저 아이는 아버지로 부터 사랑을 못 받아 마음이 상하였고, 너라는 권위자를 만나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경험하고 싶은 마음에 저렇게 행동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그는 내가 무조건 밉겠지만, 사실 그의 마음속은 아버지의 사랑을 향한 갈망이 너무도 크기에 뒤틀려진 행동을 하는 것이었죠.

그때 저는 사역에 있어서 사랑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올바르게 자라려면 사랑을 받는 경험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자라나면서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부족하고, 그러한 사랑의 결핍은 누군가 그 사람을 사랑하기 전 까지는 인생의 가장 커다란 문제로 남기 마련입니다. 그러한 사람을 사랑해 주는 것이 바로 사역자의 역할이겠지요 특히 요즘처럼 부모의 사랑을 모르고 자란 세대에게는 더욱 부모의 역할을 해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저의 인간관계의 기본은 'give and take'였던 것 같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 내게 잘 해주는 사람에겐 나도 잘해주고, 내 마음에 안드는 사람, 내게 상처주는 사람은 무시하고 멀리 했죠. 예전에는 그게 옳은 태도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특히 사역자가 사역의 대상자에게 사랑을 베풀 용의가 없다면, 이는 온전한 사역자의 태도가 아닐 것입니다. 마치 부모가 오래 참음으로 자식이 성년에 이르도록 도와주듯, 사역자라면 아비의 마음을 가져야 사역의 대상이 자라날 수 있겠죠.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스승은 많지만 아비는 여럿이 아니다. 너희 아비는 바로 나다'라고 말했습니다 (고전 4:15). 많은 교회를 세운 바울은 결국 그 교회들에 의해 다 버림 받고, 늘 외로움과 거절감과 싸워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늘 '아비의 마음'을 잃지 않았고, 그렇기에 자신있게 '나는 너희의 아버지다'고 말할 수 있었죠. 제가 계산적인 태도로 학생들을 대한다면, 제 감정은 보호가 되고, 사역도 효과적으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버지의 마음은 배울 수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점에서 프랑스 DTS에서 겪은 힘든 경험은 하나님이 제게 아버지의 마음을 가르치시고자 특별히 준비한 귀중한 기회였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30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더욱 성숙한 마음을 품기 원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으로 사역의 대상을 포용하고, 감싸주고, 그들이 성숙하도록 인내로 도와주는 자가 되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가능토록 은혜를 주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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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감정

카테고리 없음 2007. 12. 20. 19:14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보낸 첫번째 편지를 매우 과격한 말로 마무리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고전 16:22)


여기서 "저주를 받을찌어다"로 번역된 말은 단지 "벌을 받을찌어다" 또는 "안 좋은 일을 당할찌어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부터 버려저서 구원의 소망이 없이 지옥에 던져지리라는 뜻입니다. 즉,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구원되지 못한다는 말이지요. 이는 "예수를 믿기만 하면 천국에 간다"는 말이 성경의 가르침과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예수를 믿을 뿐 아니라 예수를 사랑하는 자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고, 진정으로 천국에 갈 수 있는 자이지요.

바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특권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바 되었느니라 (고전 8:3)
이 구절을 쉽게 번역하자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도 그를 아신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그를 모르시겠죠. 예수님은 마지막 심판 날에 자신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 내며, 많은 권능을 행한 사람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며 쫓아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쫓아내신 이유는 그들을 알지 못하시기 때문이고, 예수님이 그들을 알지 못하신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을 사랑해야 할까요? 우리는 교회에서 늘 "사랑은 감정이 아니다, 결단이다"는 말을 듣습니다. 하지만 저는 "사랑은 감정이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여기 서로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넘치는 부부가 있고, 서로에 대한 사랑의 감정은 없지만 사랑하기로 결단한 부부가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어느 쪽이 더 올바른 부부의 모습일까요? 여기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넘치는 그리스도인이 있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은 없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기로 결정한 그리스도인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어느쪽이 더 하나님을 사랑하는 올바른 모습일까요? 사랑하기로 결정한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보다 더 낮은 수준일 수 밖에 없습니다.

현대인이 "사랑"을 하지 않고 "사랑하기로 결정"만 하는 까닭은 현대인의 감정상태가 정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은 거대한 두뇌, 과발육한 욕정, 그리고 매마른 감정을 가진 존재입니다. 따라서 현대인이 가장 믿지 못하는 것이 바로 감정입니다. 현대인에게 감정은 우울, 혼동, 불안정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죠.

하지만 사랑이 사랑이기 위해선 감정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랑의 감정을 우리에게 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갈 4:6)

이 구절은 그리스도인의 신분 (하나님의 아들)으로 부터 시작해서, 이러한 신분에 맞는 감정 (아들의 영), 그리고 이러한 감정에서 흘러나오는 행동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름)까지 보여줍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이 신분에 맞는 감정이 들지 않음으로 감정을 결단이라는 의지로 대체하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감정이 없이 결단에 의존한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고, 따라서 이러한 사랑을 추구하는 사람은 쉽게 지쳐버릴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속에 사랑의 감정을 부어주시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감정을 억누르고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진정으로 우리와 사랑의 감정을 나누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고 성령이 주시는 감정에 자신을 맏길 때, 우리는 하나님과 새로운 수준의 친밀감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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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준비함

카테고리 없음 2007. 12. 19. 21:09
저는 얼마전 부신 절제 수술을 받았습니다. 올 봄에 이상한 증상이 나타나 병원에 갔더니 알도스테론이라는 호르몬이 많이 나오고 있더군요. 그 원인을 찾기 위해 CT를 두 번, MRI를 한 번 찍었는데, 그러고도 문제를 발견하지 못해 병원에 입원해서 혈관조영 (다리에 있는 혈관으로 관을 넣어 양쪽 신장에서 나오는 피를 직접 체취함)을 한 끝에 왼쪽 부신 (신장 위에 있는 작은 기관)이 문제라는 사실을 발견했고, 그래서 그 부분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은 것입니다. 수술을 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을 들었을 때, 수술에 대한 부담도 있었지만, 몇 달이나 끌어온 문제가 해결된다는 기쁜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만큼 그간 원인을 못찾아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막상 수술을 며칠 앞두고는 불안한 마음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겁이 많아서 수술을 두려워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 저는 객관적으로 봐서 위험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전혀 겁을 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놀이공원에서 위험해 보이는 기구를 타는 것은 제게 전혀 겁나는 일이 아닙니다. 놀이기구는 위험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위험하지 않기 때문이죠. 놀이기구를 타다가 이용객이 다치면 놀이공원에 손해이기 때문에 위험의 요소를 미리 다 제거했으니까요. 같은 이유에서 몇년 전 번지점프를 할 때도 머뭇거리지 않고 뛰어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의사가 안전하다고 장담하는 이러한 수술에 대해서도 별로 겁이 나지 않아야 정상일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겁이 났습니다.

생각해 본다면 제가 이 수술에 대해 겁을 내기 시작한 것은 이 수술을 하려면 부분 마취가 아니라 전신마취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부터입니다. 그 전까지는 이 수술이 그냥 불편하고 아마도 조금은 아픈 수술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전신마취를 한다고 생각하니 겁이 든 것이지요. 전신마취를 하게 되면 환자는 의식을 잃은 가운데 의사가 수술을 하고, 환자는 수술이 끝난 상태에서 깨어나게 됩니다. 제가 겁이 나는 부분은 "의식을 잃는" 부분입니다. 의식을 잃은 가운데 내 몸이 변하고, 깨어나면 다른 상태인데, 나는 의식이 없기에 그러한 큰 변화에 대해 전혀 개입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불안한 것이지요.

같은 이유에서 저는 죽음도 두려워합니다. 물론 저는 크리스천이기에 죽으면 천국에 간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막상 죽음의 순간을 생각해 보면, 제가 죽는 순간 의식을 잃어 깨어날 때까지 어떤 일이 있어도 제가 컨트롤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죽음이 두려운 것이라기 보다는, 내가 콘트롤을 잃는다는 사실이 두려운 것이지요 (그러고 보면 저도 대단히 컨트롤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란 생각이 드네요).

중세 그리스도인들은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memento mori)는 말을 마음에 세기고 살았습니다. 해골을 앞에 놓고 기도하거나 생각에 잠긴 남자의 그림은 모두 이러한 주제를 표현하지요. 사람은 언젠가 죽기 마련이고, 따라서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죽음에 대해 준비를 하며 살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하지만 현대인은 "죽는다는 사실을 잊고 살아라"는 말을 따라 사는 듯 합니다. 건강에 대한 집착이나 동안에 대한 관심은 모두 영원한 젊음을 누려 죽음을 피하고 싶다는 생각에 근거한 것이지요. 그러나 아무리 어려보이는 얼굴도 언젠가는 늙고, 언젠가는 죽습니다. 따라서 현대인은 어느 시대의 사람들 보다 더 죽을 준비가 안된 가운데 죽습니다. 슬픈 일이지요.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죽음에 대해 두려워한 이유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하여도, 하나님이 나를 천국으로 이끄신다는 믿음, 그러한 믿음이 있다면 죽는 순간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하여도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시 17:15)

그의 말은, "내가 죽음의 잠에서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는 뜻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었기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따라서 죽을 준비가 된 상태로 살았죠. 저도 죽을 준비를 하며 살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내 삶을 내가 컨트롤하지 않아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살고 싶습니다. 그래서 죽을 때 기쁜 마음으로 두려움 없이 죽고 싶습니다. 내가 죽음의 잠에서 깰 때, 나는 주의 형상을 보고 만족할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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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

카테고리 없음 2007. 12. 19. 00:01
예술가를 분류해보면 크게 세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죠. 첫번째는 모짜르트처럼 어릴때 부터 천재적인 재능을 보이지만 젊어서 죽고 마는 형, 두번째는 바하처럼 처음에는 그냥 그렇지만 오랜 기간동안 노력을 다하여 결국 높은 예술적 경지에 이르는 형, 세번째는 바로 피카소 처럼 타고난 재능이 뛰어날 뿐 아니라 명도 길어 수많은 명작을 남기는 형입니다. 이런 세 번째 유형의 예술가들은 말년으로 갈수록 재능과 연륜이 어울어진 작품을 남기기 때문에 이들이 남긴 말년의 작품은 참으로 감동을 일으키는 힘이 큽니다.

제가 좋아하는 피아니스트 Vladimir Horovitz도 세 번째 유형의 예술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젊었을 때부터 천재 피아니스트로 널리 인정을 받은 그는 80이 넘어서까지 공연을 하였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젊어서는 고난도의 테크닉을 요구하는 리스츠의 곡들을 연주하길 즐겼던 그가 말년에 이르러서는 초등학생도 연주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한 슈만의 '트로이메라이'를 가장 많이 연주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연주하는 트로이메라이를 들어보면 정말 평생을 피아노와 함께 살아온 대 예술가의 연륜이 단순한 선율을 통해 아름답게 표현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더이상 어려운 곡을 연주해서 누구한테 인정받을 필요가 없어진 지금, 그는 한껏 여유롭게 어린이의 곡을 진심으로 즐기며 연주할 수 있는 것이지요.

전에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Minority report'를 보며, 스필버그도 어느새 거장의 여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젊어서 죠스, ET등을 만들며 엄청난 대중적 성공을 누렸고, Schindler's List, Saving Private Ryan 등으로 예술적인 재능도 인정 받았으며, Dreamworks 를 설립하여 재정적인 안정도 얻은 지금, 그는 어떤 걱정도 없이 자신의 영화적 재능을 표현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여유로운 마음가짐으로 영화를 만들면 영화의 수준이 더욱 높아지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지난 2003년 프랑스에서 사역을 마치고 돌아오며 가장 크게 든 생각은, '이제 나도 좀 여유를 갖고 살아보자'는 것입니다. 사람이 젊으면 더 치열하게 사는 것이 정상이겠죠. 생각도 극단적으로 하고, 말도 극단적으로 하고... 그런데 나이를 먹으면 '아, 꼭 그것이 옳은 것은 아니구나' 하고 생각하는 단계가 오는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방향이 틀린 것은 아닌데, 똑같은 방향을 계속 가야 하는 것은 맞는데, 좀더 여유롭게 걸어가도 되는거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것이지요.

광고도 보면 작은 회사는 강하고 자극적인 광고를 합니다. 여유가 있는 회사는 광고도 여유롭습니다. 코카콜라 광고를 보면 곰 몇마리가 장난치다가 콜라 마시고 끝납니다. 나이키광고는 작대기 인간이 동네 총각들이랑 농구하는 것이 전부이지요. 전에 나온 IBM광고는 엄마 코끼리랑 아기 코끼리가 걸어가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내가 만들어 온 인생의 광고는 어떤 색깔이었나 반성해 봅니다.

어린 나무는 쑥쑥 자랄지 몰라도 그 밑에 그늘이 없습니다. 오래된 나무는 성장하지 않는 것 같아도 그늘이 있어서 많은 이들에게 휴식을 주게 됩니다. 나는 어떤 나무인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지금까지 쑥쑥 자라는 젊은 나무였다면, 이제는 성장의 속도보단 그늘의 넓이를 생각하는 새로운 태도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외칠 수도 있는 것을 조용히 말하는 여유. 뛰어갈 수도 있는 거리를 걸어가는 여유. 남에게 손해를 당해도 웃고 용서해주는 여유... 이렇게 여유 있는 인간이 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내게 와서 쉼을 얻고 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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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파산

카테고리 없음 2007. 12. 18. 20:56
최근 영국의 타임즈는 돈을 주고 성을 사는 남성들에 관한 칼럼을 실었습니다 (Who pays for sex? You'd be surprised). 이 글에 따르면 사람들의 상상과는 다르게 중년의 외로운 남성뿐 아니라 젊고 매력적인 남성도 성매매를 한다고 합니다. 이들이 술집에서 여자를 쉽게 구할 수 있음에도 성매매를 하는 이유는, 돈을 주고 동의하에 관계를 가지면 나중에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라는군요. 즉, 여자를 유혹해 관계를 가지면 상대방에게 일말의 책임감을 느끼지만, 돈을 주고 성을 사는 관계는 그러한 의무감이 들지 않기 때문에 성매매를 선호한다고 합니다. 이 글의 저자는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내 미래의 남편이 우리가 만나기 전 암스테르담과 프라하에서 매춘부와 주말을 보냈다고 고백한다면 내 마음이 언짢을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행동이 정욕 때문에 술집에서 여자를 잠자리로 꼬시는 것보다 더 나쁜 일인가? 나도 그렇게 접근하는 남자를 만나봤기에, 어느쪽이 더 나쁘다고 말하기가 힘들다.

다른 말로 하자면, 저자는 성매매가 나쁜 행동이라는 근거를 찾지 못하겠다는 말입니다. 즉, "남에게 피해주지 않으면 뭐든지 해도 된다"는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성매매는 상대에게 돈을 주고 서비스를 사는 것이기에 상대를 착취하는 행동이 아니기 때문이죠. 물론 몸을 파는 여성의 영혼이 망가진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유물론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영혼의 파괴는 논쟁의 근거가 되지 못하죠. 결국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잘잘못의 기준은 법인데, 영국은 성매매 알선이나 성매매 광고는 허용이 안되도, 성매매 자체는 불법이 아닙니다. 즉, "성매매는 불법행위니 하면 안된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지요.

이처럼 뻔히 잘못된 행동도 잘못되었다고 판단할 수 없는 것이 영국을 비롯한 많은 선진국의 현실입니다. 대부분의 사회에서 인간은 올바른 행동과 잘못된 행동을 구분할 능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20세기 이후로 사회의 기준이 개인의 행복으로 바뀌면서, 과거에 잘못되었다고 여겨지던 많은 행동 (간음, 거짓말 등)을 잘못으로 판단할 근거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슬람 국가가 기독교 문명에 대해 "도덕적 파탄상태"라고 비난하는 이유지요.

근대 이후에 많은 사람은 "도덕은 상대적이다"라는 사실을 보이기 위해 다양한 나라의 문화를 비교해서 나라마다 도덕의 기준이 다르다는 사실을 보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결국, 도덕이란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다. 그렇다면 왜 도덕에 얽매어 살아가는가? 그냥 남에게 피해주지 않는 선에서 인생을 즐길 수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였죠.

하지만, 인간은 마음 속에 어느 정도 보편적인 판단의 기준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결혼한 후 자신의 배우자가 여러 명과 육체 관계를 이미 맺었음을 안다면, 누구나 불쾌하지 않겠습니까? 위에 언급한 칼럼의 저자도 성매매한 과거가 있는 남편에 대해 언짢을 것이라고 말해 놓고는 왜 언짢아야 하는지에 대한 근거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즉, 현대인은 잘못을 보면 잘못인줄 알아도, 왜 잘못인지 설명할 수 있는 근거가 없는 것이지요. 거짓말도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상대방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상황이라면 자신에게 유리하게 거짓말을 하고, 어떤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든 진실을 말한다면, 후자가 더 올바른 태도의 사람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현대인들이 믿는 "남에게 피해주지 않으면 뭐든지 해도 된다"는 기준에 따른다면, 습관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사람에게도 "너의 행동은 잘못이다"고 문제를 제기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따라야 할 기준에 대해 분명히 가르칩니다. 물론 모든 상황에 대한 자세한 계명은 아니지만, 성적인 방탕이나 도둑질, 거짓말 등 삶의 중요한 행동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이러한 기준을 따르기 원치 않았고, 결국 하나님께 등을 돌린 채 자신들이 살고 싶은 세상을 건설하였습니다. 그 결과 현대 문명은 영적, 도덕적 타락이 극심할 뿐 아니라, "기준"을 거부하기에 "타락"이라는 개념 조차 존재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세상이 악해질 수록 우리는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님의 기준을 따르기 원하는 마음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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